[한국전 숨은영웅] 서해함정 초임 10대 英장교, 30년뒤 포클랜드전 승전 주역됐다
여왕에 훈장 받기도, 정전 70주년 행사 초청돼…부인 "한국과의 인연이 노년 깜짝선물 돼"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영국 포클랜드전 영웅인 마이클 클랩 전 해군 준장(91)의 가슴엔 한국전 메달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포클랜드전 승리 주역으로 영국 역사에 기록된 해군 장성이 18세 엘리트 초급 장교로 처음 받은 임무가 한국전 참전이었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약 300㎞ 떨어진 잉글랜드 남서부 데번의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는 클랩 전 준장을 만났다.
그는 한국전 당시 작성한 두꺼운 업무 일지와 자신의 사진이 책을 꺼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클랩 전 준장은 70여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한국인들을 위해 싸웠다"며 "이는 포클랜드전을 비롯한 다른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그는 "독재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민주 국가가 되도록 도우려고 했다"며 "우리는 한국인들이 북한이나 중공에 편입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이해했다"고 말했다.
클랩 전 준장은 1951년 5월부터 1952년 7월까지 약 1년여 한국전에 참전했다.
1950년 1월 다트머스 해군사관학교 특별 생도(cadet)로 입교해 1년간 훈련을 받은 뒤 이듬해 1월 소위(midshipman)가 돼 경순양함 HMS 실론호에 올랐다.
싱가포르, 일본 등을 거쳐 한국 서해에 도착했을 때는 1951년 5월 8일. 그는 "아쉽게도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1952년 4월엔 중위 대행으로 진급해 호주 해군 구축함인 HMAS 바탄호에 합류했고, 7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가 탄 함정은 주로 서해 연평도 인근을 순찰하고 한·미·영 특수부대원 상륙 작전 등을 수행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보급망을 끊기 위해 서해 북쪽의 기차, 도로, 철로, 마을 등을 폭격하기도 했다.
전쟁에선 한순간에 생명이 오가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는 "어느 일요일 오후, 다들 영화를 보거나 쉬고 있을 때 망을 보다가 갑자기 곶 북쪽 뒤편 절벽에 제복을 입은 무리가 긴 참호를 파는 것을 발견했고, 공격 태세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임 장교에게 소리쳐 보고했더니 곧바로 함장이 위치를 가리키라고 하고선 '공격'이라고 소리쳤다"며 "포탑에서 대공포를 쏴 공격했고, 포탄이 지상 15m에서 터지면서 현장은 초토화됐다"고 회고했다.
클랩 전 준장은 "한 번은 섬에 특수부대를 내려줬는데 해안가에 있던 지뢰가 터져 장교의 다리가 절단됐다"며 "몇몇 함정은 폭격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해군에서 소위는 아직 실습생 같은 신분이어서 매일 업무 일지를 써서 보고해야 했다.
일지에는 기술적인 업무 기록 외에 북한군 포로들의 눈물, 당시 국제 정세, 조지 6세 서거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에 관한 소감 등도 적혀있다.
1952년 2월 10일자에는 "한국 축제여서 해안가 한국인들이 좋은 옷을 차려입고 있다고 한다. 아마 보름달 관련 축제인 것 같다"고 돼 있다.
한국전 당시 클랩 전 준장은 장교였다고는 해도 10대 어린 나이였다.
참전 명령을 받고 무섭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꽤 흥분됐던 것 같다"며 "너무 어려서 어떤 일을 예상해야 하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특별히 용감했던 건 아니다"라며 "2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전쟁은 낯선 일이 아니었고 함정에 같이 탄 동료들은 모두 전투 경험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육군 준장까지 지낸 아버지는 우리와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놀아주다가 2차대전 발발 소식을 들었고, 이후 됭케르크에서 포위됐다가 탈출했다"며 "어릴 때 독일군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면 어머니와 여동생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밤마다 긴장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 때는 싱가포르에 배치돼있었다.
이런 한국전 참전 경험은 1982년 5월 포클랜드 전쟁에서 산카를로스만에 상륙하는 '서튼 작전'을 성공하는 데 바탕이 됐다. 이는 영국군이 결정적 승기를 잡은 계기다.
포클랜드 전쟁은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영국은 이 전쟁에서 석 달 만에 승리하며 대외적으로 건재함을 알렸다.
클랩 전 준장은 해군 상륙 작전 사령관으로서 줄리언 톰슨 소장(해병대 제3 특공대 여단장)과 함께 상륙 장소를 결정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얼마 전 해병대 행사에서 연설하며 한국전 경험이 커다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며 "전쟁의 목적부터 보급 차단의 중요성, 상륙 작전 필요성과 여건 등까지 여러 면에서 한국전과 비슷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전 이후 전쟁이 없었고 해군 투자가 축소됐기 때문에 나와 같이 실전 경험을 쌓았거나 훈련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덧붙였다.
클랩 전 준장은 포클랜드전 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버킹엄궁에서 '가장 영예로운 바스 훈장'(Companion of the Order of the Bath)을 받았다. 이는 주로 장성이나 고위 공무원들에게 수여되는 것으로, 영국 훈장 중에 상당히 높은 등급이다.
그는 "여왕이 무척 편안하게 대해줘서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포클랜드전 이듬해에 퇴역하고 주식 중개인, 학교 이사 등을 지냈으며 포클랜드전 관련 책을 집필했다.
한국과는 별다른 접점 없이 지내다가 최근 연이 닿았다.
클램 전 준장은 "휴전 소식을 들었을 땐 그리니치 해군 학교에서 교육받을 때라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며 "한국전 참전 동기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 지중해 작전 등에 투입됐기 때문에 우리가 부러움의 대상이긴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에도 해군 항공대에서 대잠수함 훈련을 받고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충돌(1963∼1965) 등에 투입되는 등 정예 코스를 밟았다.
클랩 전 준장은 국가보훈처가 정전협정 70주년과 유엔군 참전의 날(7월 27일)을 앞두고 초청한 22개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의 일원으로 이번주 한국을 찾았다. 26일 만찬에선 짧은 인삿말도 할 예정이다.
사실상 첫 한국 방문이어서 무척 기대가 크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발전해 조선·자동차·휴대전화 등의 산업에서 우수한 기술력을 갖추고 경제 규모가 영국과 비슷하게 성장한 걸로 안다"며 "그땐 절대 할 수 없던 일들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오늘날의 모습을 만족스러워하며 잘 지내고 있으면 보람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포클랜드전 40주년을 맞아 공식 행사 참석차 포클랜드제도에 갔을 때 주민들이 행복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어서 놀랍고 기뻤다고 말했다.
부인 세러씨는 "10대 때 맺은 한국과의 인연이 노년에 깜짝 선물 같다"고 덧붙였다.
merci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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