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아들은 포격이 뭔지 몰라, 차라리 다행"…스러진 우크라 작가의 일기

김성식 기자 2023. 7. 2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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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군에 살해된 작가 바쿨렌코, '침공 참상' 적은 일기 자택 마당에 묻어
"우크라 멸망했단 소문 퍼뜨려"…일기 발굴한 동료도 폭격에 숨져
우크라이나의 작가 볼로디미르 바쿨렌코(49)가 지난해 3월 러시아군에 납치된 뒤 숨진 채 발견된 가운데 그의 어머니가 지난해 12월 장례식을 치른 직후 아들이 묻힌 하르키우의 공동묘지에서 그의 초상화를 닦는 모습.. 2022.12.6. ⓒ AFP=뉴스1 ⓒ News1 김성식 기자

(서울=뉴스1) 김성식 기자 =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추적하던 우크라이나의 유명작가가 최근 미사일 공습으로 사망한 가운데 그가 발굴한 '비밀 일기'가 재조명 됐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지가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비밀 일기는 지난해 러시아 점령군에 납치돼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진 동료 작가 볼로디미르 바쿨렌코(49)의 유물로 침공 초기 참상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소설가 빅토리아 아멜리나(37·여)는 지난달 27일 우크라이나 동부도시 크라마토르스크에서 러시아군이 쏜 순항 미사일에 맞아 나흘만인 지난 1일 사망했다. 당시 아멜리나는 크라모토르스크의 한 피자 가게에서 콜롬비아 작가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공격으로 아멜리나를 포함해 모두 13명이 목숨을 잃었고 60명이 부상했다.

생전 소설가였던 아멜리나는 러시아의 침공이 본격화된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인권단체 '트루스하운드'에서 전쟁범죄 조사관이 되기 위한 과정을 수료한 뒤 비문학 작가로 탈바꿈했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서사의 일관성이 파괴됐다고 판단한 그는 소설 쓰기 대신 주민들의 끔찍한 증언을 듣고 이를 생생하게 활자화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바쿨렌코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러시아군에 끌려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아멜리나는 바쿨렌코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동북부 하르키우주(州) 이지움 근교 카피톨리브카로 향했다. 이지움과 카피톨리브카는 점령 6개월 만인 지난해 9월 러시아군으로부터 해방된 지역이다. 아멜리나는 러시아군이 막 철군을 완료했을 때 카피톨리브카에 도착해서야 바쿨렌코의 부모님으로부터 그의 행방에 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가슴 속에 묻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아멜리나에게 털어놓았다. 러시아의 군용차량이 자택 앞에 온 지난해 3월 22일 바쿨렌코와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그의 아들 비탈리(13)는 친(親)우크라이나 성향을 띤다는 이유로 러시아군에 체포됐다가 몇 시간 만에 풀려났다고 했다. 이들을 데려온 군인들은 "다락방부터 지하실까지 집안 구석구석을 수색했다"고 바쿨렌코의 어머니는 회고했다.

군인들은 "다시는 데려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억양으로 보아 2014년 러시아에 불법 합병된 루한스크주(州) 분리주의자로 추정되는 이들은 바쿨렌코의 집안에서 그의 휴대전화와 각종 서류를 압수해 갔고 이틀 뒤 다시 찾아와 바쿨렌코를 끌고 나갔다. 바쿨렌코는 이를 마지막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으며 6개월 뒤 이지움 외곽의 집단 무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권총 두발에 의한 총상으로 확인됐다.

바쿨렌코는 이같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이라도 한 듯 러시아군에 납치되기 전날 자택 뒷마당 벚나무 아래 그동안 써온 일기장을 묻어 뒀다. 이 비밀 일기는 카피톨리브카를 찾은 아멜리나에 의해 발굴됐다. '내 고향이 (친러) 급진주의자들의 점령지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첫문단을 시작으로 바쿨렌코는 한달 남짓한 침공 초기 상황을 매일 손으로 써내려 갔다.

일기에는 며칠간 포탄이 주도 하르키우와 이지움에 떨어지며 러시아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고 묘사됐다. 첫 포격 이후 전기 공급이 중단되고 인터넷은 끊겼으며 휴대전화 신호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포격으로 이지움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140년 된 학교는 텅 비었고 창문은 송두리째 날아갔다. 주차된 차량은 납작해졌고 공원의 나무들은 폭발을 이기지 못해 반으로 잘려 나갔다.

바쿨렌코는 아들 비탈리와 매일 밤을 지새우면서 '엎드려'란 말을 반복했다. 자폐스펙트럼장애 탓에 비탈리는 전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아들이 겁을 먹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바쿨렌코는 일기에 적었다. 3월 7일 러시아군이 처음으로 카피톨리브카에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와의 연결망이 차단된 상태에서 군은 마을 주민들에게 옛 소련 향수를 자극하는 한편 우크라이나가 멸망했다는 흉흉한 소문을 퍼뜨렸다.

바쿨렌코는 3월 22일 "내부 밀고자들이 많다. 조만간 이들이 나를 넘길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적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러시아군을 상징하는 알파벳 'Z'가 적힌 군용 차량에 24일 끌려갔다. 러시아군이 바쿨렌코를 납치하고 살해하게 된 동기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러시아어 사용을 거부하고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문신을 해 표적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9월 우크라이나 당국에 의해 그가 처음 발견됐던 집단 무덤에는 우크라이나군과 주민 400여명이 무더기로 매장됐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권운동가 올렉산드라 마트비추크가 설립한 '시민자유센터'에 따르면 지금까지 보고된 러시아군 전쟁범죄는 4만1000건에 달한다. 마트비추크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점령지 통제를 위해 공포를 주입했다"면서 "고문과 추방, 강제 입양, 신분 박탈, 강제 수용소 설립과 대량 살상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바쿨렌코의 비밀 일기는 아멜리나에 의해 출판됐다. 일기 원고는 현재 하르키우 문학 박물관에 놓였다. 카피톨리브카 주민들은 바쿨렌코가 일기를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3월 23일을 추모의 날로 지정해 그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기로 했다. 전쟁은 계속 됐지만 바쿨렌코의 벚나무는 올봄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우크라이나의 작가 볼로디미르 바쿨렌코(49)가 지난해 3월 러시아군에 납치된 뒤 숨진 채 발견된 가운데 그의 어머니(가운데)와 가까운 친척들이 지난해 12월 장례식을 치른 직후 아들이 묻힌 하르키우의 공동묘지에서 오열하는 모습. 2022.12.6. ⓒ AFP=뉴스1 ⓒ News1 김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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