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 책 치울 때까지…도서관 마비시킨 학부모단체
충남지사 등 정치권 맞장구에 사서들 “업무 못해” 결국 제외
일 위안부 관련 책 등 포함…출판계 “사실상 도서 검열” 우려
보수성향 학부모단체들이 충남 일대 공공도서관에 성교육·성평등을 주제로 한 어린이책 등을 “폐기 처분해달라”는 민원을 전방위로 제기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집요한 민원 제기에 몇몇 도서관은 해당 도서들을 서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취했다.
충남 일대의 공공도서관들에는 지난 5월쯤부터 항의방문·전화민원 등을 통해 ‘문제 도서’들을 도서관에서 폐기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시민단체 ‘꿈키움성장연구소’가 충남 지역 도서관에 보낸 공문을 살펴보면, 이 연구소는 “교육과정에 남아 있는 성혁명적 용어들. 즉 다양성, 사회문화적 성, 성인지(감수성) 등을 근거로 동성애, 성전환, 조기성애화, 낙태 등을 정당화하거나 이를 반대하지 못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도서는 마땅히 폐기 처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며 “해당 도서 검토해 규정에 의거 폐기해달라”고 적혀 있다.
이 연구소와 일부 학부모단체 등이 도서관에 ‘서가 퇴출’을 요구한 ‘문제 도서’ 120종의 목록에는 성교육이나 젠더·페미니즘 아동용 도서뿐 아니라 미국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생애를 다룬 <나는 반대합니다>(함께자람·교학사),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그림책 <꽃할머니>(사계절) 등 여성가족부가 2019~2020년 ‘나다움어린이책’으로 지정한 도서도 23권 포함돼 있다. 어린이들이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나다움’을 찾아가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정부가 지정한 도서가 ‘퇴출 대상’이 된 것이다.
이들의 지속적인 민원 제기와 항의로 도서관 기능이 마비될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게 사서들의 하소연이다. 다짜고짜 “도서관에서 그 책 빼라”며 걸려오는 전화에 유선전화 코드를 뽑아 놓기도 했지만 허사였다는 것이다.
충남의 A도서관에서 근무하는 20년차 사서는 25일 “공공도서관의 책무에 대한 고민에 책을 서가에서 빼고 싶지 않았지만 주 5일 내내 전화를 걸어오고, 찾아와 민원을 넣어 버틸 수가 없었다”며 “결국 20여종의 성소수자 관련 책들을 서가에서 뺐는데 너무 굴욕적이었다”고 했다. B도서관 관계자도 “직접 민원뿐 아니라 도의원을 통해서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학부모단체의 집요한 문제제기에 지역 정치권도 힘을 싣고 나섰다. 김태흠 충남지사는 이날 충남도의회 본회의 긴급현안질문에 출석해 “7종 도서에 대해 도내 36개 도서관에서 열람을 제한했다”고 밝혔다. 꿈키움성장연구소 등 보수단체 관계자들이 참관한 가운데 열린 본회의에서 지민규 충남도의원(국민의힘)은 <10대를 위한 빨간책>(레디앙) 등을 들어 보이며 “학교 및 공공도서관에 비치된 수백권의 성교육 도서에 성행위 방법·성적 표현 등이 적혔다”며 “아이들에게 과도한 성적 자극이 우려되니 조처를 취해달라”고 했다.
이에 김 지사는 2020년 여가부가 ‘나다움어린이책’으로 지정했다가 ‘조기성애화를 부른다’는 보수세력의 주장에 지정을 철회했던 이들 7종 도서를 언급했다. 보수·종교단체의 항의로 여가부가 7종 도서에 대한 지정을 철회하자 ‘구시대적 발상’ ‘퇴행적’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출판계에서는 사실상의 ‘도서 검열’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문제 도서’ 목록에 오른 <소녀와 소년: 멋진 사람이 되는 법>(사계절)의 윤은주 작가는 “아이들이 성역할의 고정관념 없이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책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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