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7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올해로 54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김병운·신종원·정지아를 비롯해 이달까지 15명이 본심 후보에 올랐습니다. 앞으로 8·9월 후보 선정을 추가로 거쳐, 본심에 오를 작품을 선정하게 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이달 독회 추천작은 2권. 이서수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과 정지돈 소설집 ‘인생 연구’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은행나무, 2023.05)의 ‘책 날개’에 난 작가 소개에 의하면 이서수는 ‘월급 사실주의 동인’이라고 적혀 있다. 간단히 해석하면 ‘생계형 작가’라는 뜻이 되겠다. 실제로 이 소설집의 주된 사건들은 빈민의 각박한 삶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문제를 다룬 한국문학의 역사는 길다. 최서해로부터 조세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작가들에 의해 숱한 작품들이 씌어졌다.
이서수의 소설을 돋보이게 하는 건 무엇일까? 오늘날의 소설 네트워크(소셜 네크워크가 아니다)에서 보자면, 그의 소설이 사회적 문제를 사회적 의제 그대로 끌고 가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사정으로 환원한 다음, 다시 그것을 사회적 의제로 재환원하든가, 아니면 내면의 사색으로 치환하든가 하는 소설들과는 달리 말이다.
이서수의 인물들은 그들의 형편이나 그들의 행위가 사회 구조(물론 이 구조는 변동성의 구조라는 점을 부기해야 할 것이다)라는 그물망에 긴박(緊縛)되어 있어서, 결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시시각각으로 체감한다. 개인적 공간의 확보와 그로의 출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저마다 상이한 문제에 직면하지만, 그것들은 ‘부동산과 연금’의 문제로 수렴되거나 사람들을 특정한 프레임 속에 가두어버리는 인습적 고정관념들에 포박된다. 현실의 문제틀을 적나라하게 마주보게 하는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한데, 동시대를 벗어나서 한국현대소설사의 흐름 속에 이 소설을 넣어 보면 어떤가?
가령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적 기능이 두드러진다. 이 현실이 자본과 노동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 건 김병익에 의해 ‘스타카토 문체’라고 명명된 그의 단절적 단문 묘사이다. 이 단문들은 그 형태 그대로 현실의 파편들이며, 인물들을 찌르는 흉기들이다. ‘난장이’의 죽음과 더불어 난장이의 봇짐에서 쏟아져 나온, 가지가지의 공구와 부속들이다.
그러한 현실의 폭력성을 이성적 인식의 길로 끌고 가는 건 ‘지섭’이라는 지식인이다. 노동자들은 그를 통해 사회 현실에 대해 각성하고 자신을 재정위하게 된다.(’지섭’을 ‘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른 어떤 평론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서양의 소설이론의 ‘억지춘향’격의 오용이다.)
그 점에서 조세희의 사실주의는 외재(外在)적이다. 그것은 판단하고 묘사하고 알게끔 한다. 그에 비해서 이서수의 사실주의는 철저히 내발(內發)적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가 동일한 파도 위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부표도 서핑 보드도 없으며 설혹 있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난파 중이다.
똑같은 내발적 사실주의이지만 최서해와도 다른 면이 있다. 최서해 소설은 토막난 몸뚱아리들의 비명과도 같다. 현실을 적나라하게 전달하지만, 그것은 오직 사실들일 뿐이다. 의미가 덧붙으려 하면, 묘사된 장면들 곳곳에서 헤진 부분이 드러난다.
이서수의 소설들에선 사실과 의미가 하나로 맞붙어서 표류한다. 사실과 감정과 생각이 세 겹의 너울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양상이 단박에 현실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주는 건 아니다. 그건 아니지만, 이 겹들은 인물들의 경험에 고르지 않은 두께를 부여하며, 그것이 특별한 리듬을 생산한다. 모든 리듬이 그렇듯이 이 리듬은 흡인력이다. 독자는 딱딱한 사실에 부닥쳐 저항감을 갖는 대신에 이 리듬을 타고 작중 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동시에 이 리듬은 생성력이다. 가난은 그저 고착된 사실이 아니다. 그걸 고착화하려는 현실의 압력에 저항해서 가난한 자들, 즉 가난의 몸체들은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그렇게 용쓰다 보면 ‘자본이 없어서 몸 밖에 팔 게 없는 이 사람’들의 몸이라는 밑천이 양질의 원기소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컨대 몸에 대한 사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이서수 소설을 읽는 각별한 재미이다.
◊정지돈 ‘인생 연구’
‘인생연구’(창비, 2023.05)를 읽으면서 정지돈이 제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소설의 무대에는 정상적인 독자가 보기에는 어이없는 모습들과 행동들이 빈번히 출현한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하는데, 그 근거가 불투명했다.
이번 소설집에 와서 소설적 요소들의 정돈되면서 단서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단서를 알아차리면 그의 소설쓰기가 매우 깊은 고뇌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어서 알 수가 있다. 가령,
“진양의 졸업영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얘가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을 것이다. 진양은 튀는 걸 싫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건 언제나 도드라졌다”(‘B! D! F! W!’)
와 같은 대목은, 소설가를 세상에 알린, ‘내가 싸우듯이’(문학과지성사, 2016)의 첫 작품인 ‘눈먼 부엉이’의 첫 대목,
“에리크 호이어스인가 뭔가 하는 자식이 찾아왔을 때,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내게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었고 처리해야 할 고지서도 산더미처럼 있었으며, 처리해야 할 작자들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년 조금 안 되게 사귄 여자 친구는 이별을 선언하고 다르푸르로 봉사 활동을 떠났으며...”
와 거의 동일한 소설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 그 요소들이 정돈되어 대체로 ‘광기’(‘미쳐버리다’)는 인물 쪽으로 집중되고 화자는 다른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정돈을 통해서 독자가 주운 첫 번째 단서는 그의 소설의 중심 인물들은 사회부적응자라는 것이다.
이런 인물 설정은 흔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정지돈의 부적응자들은 대체로 실패한 혁신가들이다. 요컨대 뭔가 해보려다가 망가진 사람들이다. 방금 인용한 첫 번째 대목에서도 보이지만, 외형만 요란한 게 아니라(“튀는 걸 싫어하는 내성적인 성격”) 실질적으로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의욕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망가진다면 왜인가?
여기에서 고루한 현실의 방어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한다면 상투적인 광경이 되리라. 정지돈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그게 아니라 순수한 의욕 자체가 광기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현실에 의해 방해받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현실의 풍조를 교묘히 타고 넘은 사람들조차도 똑같은 수순을 밟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단서이다. 간단히 축약하면 ‘선(善)’이 ‘광기’로 전화하는 사태가 이 소설집의 심층 제재이면서 그 사태는 무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선이 광기로 변하는 사태를 ‘이념’(idea)이 ‘이데올로기(ideology)’로 전화하는 사태로 치환하면, 독자는 작가의 이 설정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전반적 감정 상황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한 ‘광기’로의 드러냄은 이 감정상황의 폭력성을 환기시키기 위해 기능하고 있음도 느낄 수 있다. 요컨대 ‘선’의 의지가 넓은 의미에서의 ‘PC(political correctness)’의 위세를 입으면서(넓은 의미에서의 PC란 세계를 위해 올바르다고 판단된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가진다는 뜻이다), 점차로 억압적 권능으로 화하고, 그것이 마침내 폭력의 무차별적 실행으로서의 광기로 터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단서는 이때 광기는, 통상 연상하는 것처럼, 힘 센 권력의 광기가 아니라 ‘권력’과 관계된 모든 위상에서의 광기 혹은 그 위상들에 배치된 만인의 광기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아주 이질적인 양상들과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만 ‘망가짐’의 상태로 흘러가고 있다는 방향만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흘러감 속에는 여전히 ‘선’의 의지가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지키고 싶어 하는 욕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어서, 그것이 진정 괘주를 돌이킬 수 있는 데 기능할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비자각적 멸망을 가속시킬 것인지를 불안하게 지켜보게 한다.
이러한 진단은 결국 한국사회에 대한 은밀하고도 독한 저주가 될 것인가? 화자의 태도를 간단히 짚어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불안에 마지막 단서가 있다 할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자는 ‘불안’을 두고, 특별히 ‘분노’라는 감정과 대비시키면서, ‘분노’가 강력한 감정émotion이라면 ‘불안’은 ‘동요émoi’임을 지적하고 어원적으로 ‘동요’는 ‘감정’의 정반대라고 하였다(’세미나 X, 불안’). 왜냐하면 감정은 행동을 충동하지만, 동요는 행동의 와해, “행동 에너지의 저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주요 마음 상태가 ‘불안’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바로 ‘선의 이데올로기’의 폭주를 멈추고 이성적 운산의 여백을 마련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아마도 작가가 3년 전에 발표한 ‘모든 것은 영원했다’(문학과지성사, 2020)가 그의 새로운 진전을 위한 계기가 되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 작품에서 이념에 목숨을 걸었던 사회주의자의 운명을 추적하면서, 실제로 내내 확인한 것은 ‘산다는 것’의 고단함과 “사물들은 각자의 자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어느 날 모든 게 엉망이 되”는 속수무책으로 진행되는, 모든 의지의 자기배반이라는 아이러니(박영희가 차페크의 ‘R.UR.’을 번역했다는 에피소드는 그 아이러니의 허방을 들춰내고 있다)였으니, 그 확인을 글로 옮기는 경험이 그의 소설쓰기에 관여적으로 작용했으리라고 짐작한다.
◇구효서·소설가
◊정지돈 ‘인생 연구’
그동안 정지돈의 소설을 읽어 오면서 이 작가는 구성치(물론 이런 말은 사전에 없다)가 아닐까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떡하려고 끝없이 이러는 걸까,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깜짝 놀라 작가에 주목해온 사람으로서 저으기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마침내 그 염려를 접게 되어 그동안 눈치 보며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구성치라는 말을 뱉게 됐다.
치라고 썼듯이, 그것을 작가의 한계로 간주했다는 말일 텐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지돈은 그 한계를 나름의 독특한 메타(적) 소설로, 극복을 넘어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로 건축해 냈거니와 오늘의 ‘인생 연구’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픽션이 픽션이기에 빠질 수 있는 서사적 한계를 팩트로 꽉꽉 채우며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솜씨. 거기에 독자들은 기꺼이 설득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극복할 게 없던 한계였다. 공연한 염려가 한계라면 한계였다. 전부 정지돈이 새로 개척한 땅이니 얼마가 됐든 소출은 모두 정지돈의 몫. 이제 그에게 새삼 구성 따위 기대할 리 없다. 구성치라는 말을 맘 편히 뱉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그의 작품에 구성이 부재했던 게 아니었으므로.
소설이란? 구성이란? 이런 질문에는 자기지시적 동어반복의 답변밖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 소설은 소설이고 구성은 구성. 그 외의 어떤 설명도 답에 이르지 못하며, 답이라 하는 것도 그저 답이라는 말에 불과할 뿐이어서 아무려나 상관없는 것. 언어와 그것의 결집물인 온갖 개념들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촉발시켜 결국 세상의 모든 작품이라는 것이,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구조 자체를 시뮬라크르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짓궂은 글쓰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제목의 도서가 있듯이, 정지돈도 하마터면 열심히(하릴없이) 이른바 저 ‘치밀한 구성’의 작품들을 써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고난 구성치(처럼 보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그는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열심히들 하게나. 나는 희희낙락 무애의 언덕으로 가려네. 플라뇌르.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이 아닌’ 94-95쪽.)
픽션과 논픽션이 활달한 상상과 우연성을 만나 새로운 지평으로 예측할 수 없게 확장해 나아가는 게 그의 소설이지만 차원을 달리한 또 하나의 서사가 겹을 이루어 나란히 진행되는 특징이 있으니, 자기가 만드는 글을 자기가 응시하는 시점의 맥락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 편집증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 고도로 설계된 편집증, 스스로의 글을 불신하면서도 글쓰기를 지속하기 위해 고안된 메타-글쓰기.”(‘인생 연구’, 39쪽.)
거의 자백이다시피 한 위의 문장에서처럼 ‘나’는 정지돈이며, 이야기 안에서 언제나 글을 쓰며 책을 내는데 실제 정지돈의 이력에 부합한다. 그래서 정지돈의 픽션 앞에는 거의 언제나 메타렙시스와 오토바이오그라피라는 관형어를 붙일 수 있다. 길을 잃고 헤매야 즐거워지는 산책자라면 길의 개수가 여럿이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층위도 여럿이기를 바랄 것이다.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는 분은 출판사를 통해 연락 바람.” (같은 책 96쪽.)
“옳고 그름을 따지자고 글을 쓰는 게 아니니까.” (같은 책 174쪽.)
“강력한 휘발성을 목적으로 하는 텍스트였다고, 그는 말했다. 플랫폼에 길들여진 감상적인 문학 나부랭이와는 다르지.” (같은 책 210쪽.)
“신문기자의 리뷰 따위 누가 읽겠는가, 요즘 세상에!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리뷰할 소설을 읽지 않았다. 책이 왔으니까 펼쳤고, 몇 문장 소리 내어 낭독했고 작가의 말을 통독했으며 해설은 두 문단 정도 읽은 것 같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보내준 보도자료는 꼼꼼히, 게걸스럽게 읽었다.” (같은 책 220쪽.)
“이제 누구도 텍스트를 판단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 거라고, 모든 기준과 권위가 소금기둥처럼 무너져 내릴 거라고, 그때가 되면 텍스트는 각자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 거라고.” (같은 책 221쪽.)
“반영하거나 재현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배운 어떤 규칙이나 형식도 잊으라고……그렇게 하면 어느 순간 다른 차원에서 전파되는 상상력과 마주할 거라고, 그걸 통해 현실을 창조하라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라 다른 현실, 진짜 현실을 창조하라고 말했다.” (같은 책 223쪽.)
산책자처럼 걷고 산책 같은 글을 쓰면서 그런 글과 그런 글을 쓰는 자신에 대해 간화선 수행자처럼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산책은 평평한 트랙을 쳇바퀴처럼 도는 일이 될 것이다. 그가 보르헤스의 뫼비우스적 중첩과 에셔의 카운터 드로잉(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을 연상케 하는 글쓰기를 시도하는 이유도, 있는 언덕을 걷는 산책자가 아닌, 자신이 창조한 ‘진짜 현실’의 언덕을 걸으며 그 언덕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트랙이나 쳇바퀴의 다른 이름인 산책로라는 게 있을 턱이 없고, 자신이 걸은 흔적마저도 그는 속히 휘발해 버리길 바란다. 난독과 실어가 어떤 환유를 이끌어낼지, 이질적인 것들의 파격적인 결합이 어떤 사달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상실과 망각의 와중에 있으며 그런 방식의 있음이 즐거워 한시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돼. 문을 열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거기가 어디가 될진 몰라. 문을 열지 않으면 여기서 영원히 살아야 돼.” (같은 책 250쪽.)
어떤 이의 소설이 사과를 감싸는 크라프트 종이 완충제들로 포장된 택배상자라면 그의 소설은 박스째 먹어버려도 되는 기이한 배송품이다. 읽기도 그렇지만, 그의 소설이 이제는 너무 한낮의 아이스크림 같아서, 그것에 관해 쓰는 데도 부담이 없다. 현 단계의 그의 조용한 혁명-어떤 것(말)에도 속지 않겠다는 가열한 농담:不受人惑-이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승우·소설가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꿈과 현실, 낭만과 생활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이 흔들림은 비대칭적이다. 거의 항상 현실과 생활 편으로 크게 치우쳐 흔들리는 듯 하다가 멈춘다.
“도대체 우리는 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돈이 없나. 꿈과 돈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언니도 알았다. 꿈을 제대로 이루거나 완전히 버려야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인물들이 이서수의 소설에는 유독 많이 나온다. 꿈은 대개 그림이나 글쓰기, 예술을 향한 것인데,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전제된다. 그런데 돈은 꿈을 제대로 이루거나 완전히 버릴 때만 생긴다. 그러니 이 흔들림이 불균형일 수밖에. 꿈은 생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한다. 내려 앉을 곳을 빼앗긴 참새들은 공중을 날다가 힘없이 떨어져 죽는다. 꿈은 포기된다. 현실과 생활의 구체는 돈이다. 돈은 이념과 낭만과 꿈을 집어 삼키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웅덩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중심을 못 잡고 잠깐 날다 곤두박질치는 연을 보는 것 같은 아찔함과 안타까움을 준다. 이 소설들은 우리가 어떠한지 보고하고 우리가 어떻게 잘못하고 있는지 비판하고 우리가 이러면 안 된다고 반성한다. 그러면서, 그러다가 자책한다.
인물들은 시대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한다. 예컨대 젊은 근희나 미조는 그들의 시대가 지운 짐에 허덕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정도의 차이를 빼고 말하면, 어느 시대나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의 젊은 영호, 영수, 영희가 언뜻언뜻 스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2023년의 이서수는 1970년대의 조세희가 그 시대 현실의 험악함에 제대로 맞붙기 위해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학적 무기인 미문조차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그때보다 결코 덜 험악하지 않다는 선언 같은 것이 아닐까.
이서수는 절대로 미화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쓴다. 그의 인물들 가운데 감상적이거나 겉멋 부리는 댄디는 한 명도 없다. 집값 시세와 취업과 돈을 모으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 인물은 없다. 모두들 ‘시대의 충실한 구독자들’이다. 그래서 간혹 맨살을 보는 듯 거북하지만, 그만큼 용감하다는 생각도 든다. 시대의 징후를 읽고, 읽은 것을 드러내는 데 민첩한데, 이는 성찰 못지않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생활과 일과 돈을 꿈과 이념과 낭만에 앞세우기가, 그러니까 미화하지 않고 쓰기가, 솔직해지기가 훨씬 어렵다는 걸 알만한 사람은 안다.
◇김인숙·소설가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현실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시대를 막론하고, 세대를 막론하고. 그래서 좌절하고 그 좌절하는 마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에 멈춰 서있는 사람이 우연이거나 필연적으로 ‘이 시대’의 청춘들이라면 그들은 무엇을 말하게 될까.
시대나 세대의 버거움에 대한 이야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던 이야기. 그러나 그래서 절실하고, 절박한 이야기. 이서수는 멈춤없이 한 편 한편, 이야기를 쌓아올린다. 멈칫거리는 법이 없을 뿐더러 돌아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때때로 말은 뾰족하다. 그 말들이 얼얼하고, 때때로 숨이 가쁘기도 하다. 그렇지 않을 방법이 없어서일 것이다. 우회하고 은유하기에는 이 시대, 이 세대의 좌절이 너무나 구체적이다.
등단작을 포함해 10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 속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가진 게 없다. 집이 없고, 뭘 물려줄 부모가 없고, 안정적인 직장이 없다. 당연히 돈이 없다. 내 파트너인 사람도, 내 친구도 나와 다를 바가 조금도 없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미래가 없다. 그런데도 살아가야 한다. 방법이 없는 날들이 하루 하루 쌓여간다.
“그러고 있는 동안 내가 누군지, 이곳은 어디인지 헷갈렸다. 순간적으로 현재를 상실했다.”
단편 ‘미조의 시대’에 나오는 이 문장은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의 말이기도 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미래는 현재보다 더 가난하고, 더 대책이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누군지’ ‘이곳은 어디인지’ , 이제부터 더욱 적나라하게 펼쳐지게 될 현실의 시작. 말하자면 이런 식.
“5천만원으로 서울에서 전셋집을 구하겠다고? 수영 언니는 내 잔에 소주를 따라주다가 놀란 어조로 물었다.”
놀라는 것이 마땅하다. 어이없어하거나, 딱하게 여기는 대신. 이 단순한 문장에 시선이 가는 것은 이야기를 쌓아올리는 작가의 능숙한 솜씨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쫒아가다보면 대책없는 현실만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그 사람 곁에 항상 또다른 사람이 있다. 온전히 혼자인 사람은 없다. 그래서 소설에 겹이 생긴다. 현실에서 멈추지 않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겹. 이토록 고단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뜻밖의 온기, 뜻밖의 웃음. 가령, 시를 쓰는 어머니처럼.
“부대찌개를 앞에 둔 시무룩한 체코인 종이컵에 꼬인 백 마리의 개미… 거기까지 읽더니 엄마는 말이 없었다./ 끝이야? /떡집에서 못 팔고 버린 떡 같은 하루.”
이런 시를 쓰는 어머니 곁에 이런 시를 들어주는 딸이 있다. 그들은 이제 곧 살던 집에서 쫒겨날 것이며, 5천만원으로는 당연히 집을 못 구할테니 반지하방으로 가게 되거나 뿔불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떡집에서 못 팔고 버린 떡 같은 하루가 계속 이어질테다. 그러나 그 날들은 다시 소설이 될 것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정지돈 ‘인생 연구’
정지돈의 소설집 ‘인생 연구’는 작가(화자)의 주변에 머문 적이 있거나 간헐적인 만남을 이어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와 이런저런 인연을 이어간 사람이나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은, 소설양식의 오래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식민지의 주변인 황수건의 서글픈 삶을 다루었던 이태준의 ‘달밤’이나, 소도시 은척을 휩쓸었던 깡패 조동관의 일대기를 그려낸 성석제의 ‘조동관약전’ 등은, 이와 같은 소설적 주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작품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소설집 ‘인생 연구’에서 다루어지는 사람들은 어떠한 모습일까. 한 동네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다가 주인공의 아버지와는 바람을 피웠고 어머니와는 언니 동생으로 지낸 베티 아줌마, 아랫입술 안쪽에 돌 석 자가 적힌 문신이 있고 전설적인 조폭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지만 아버지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주인공에게 야구선수 양준혁의 사인을 받아준 석이 아저씨,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였고 한때 같이 살기도 했지만 유령처럼 간헐적으로 출몰하며 주인공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안젤라, 미국 SF작가와 뮤지션이 협업한 서사시로부터 배리 보바라는 이름을 가져와 필명으로 삼았고 자신은 검은 은하계의 중성자별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아프리카계 프랑스인 재즈 뮤지션의 관점에서 한국의 문화현상을 논평했던 인터넷 논객 등등. 황당하기도 하고 망상에 빠진 인물이 대부분이고, 뭔가 “중요한 게 빠진 기분이” 들고 “계기나 배경 같은 인과관계가 쏙 빠져 있”(167면)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조금씩 건너들은 전언들, 책이나 신문 또는 인터넷이나 SNS에서 얻은 정보들을 조합하여 작성된 이야기들이라서, 작품에 나온 말처럼 “어딘지 모르게 틀린 내용이 있거나 빈 내용이 있을지도”(184면) 모르는 이야기들이다. 왜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했는가를 작가도 밝히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부채의식이나 휴머니즘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좋게 말하면 작가의 무의식을 비집고 솟아올라오는 이야기들이고, 다르게 말하면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되어서 별다른 결말도 없이 마무리되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1960-70년대부터 21세기까지 우리 주변에 있었던 삶의 모습들인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한국현대사의 주류 담론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기억하지 않는 삶의 모습들에 해당한다. 달리 말하면 문학이나 소설이 아니라면 기록이나 기억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인생들이 ‘인생 연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소설집의 말미에는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라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작가가 올해 3월 챗GPT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씌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의 문제의식이 조금은 명료해지는 것 같다. 인공지능이 제대로 대답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 또는 사람들이 인공지능에게 물어볼 것 같지 않은 인물들. 그러니까 너무나도 안 유명하거나 너무나도 그저그런 인생들. 인공지능이 수집하고 학습할 수 있는 정보의 경계선 그 안과 밖을 넘나들고 있는 삶의 움직임들. 아마도 작가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소설이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지속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짐작해 볼 따름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여백(margin)을 사고하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공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충분히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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