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해석의 힘

기자 2023. 7. 2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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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아빠는 내게 자신의 양손 손바닥을 펼쳐 보여주었다. 여기저기 붉은 수포가 어지럽게 돋아 있는 손바닥. 엊그제 진료실에서 얘기한 대로 아이들에게 수족구를 옮았나보다. 연달아 수족구에 걸려서 힘들어했던 아이들이 겨우 좋아진 후, 그 아이들의 아빠가 인후통이 심하다고 진료실에 왔었다. 나는 감기일 수도 있지만, 수족구일 수도 있겠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틀 후 손바닥에 돋은 붉은 수포로 수족구가 확진되었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가정의학과 전문의

수족구의 원인 바이러스가 콕사키바이러스에서 엔테로바이러스로 바뀐 후 간혹 수족구에 걸리는 성인들이 있다. 수족구에 걸렸던 성인들이 많지도 않지만, 그 대다수는 아이들의 엄마이거나 어린이집 교사였다. 내 진료실에서 수족구에 걸린 성인 남성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남성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면역력이 낮아 아이들이 걸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아플 때 많이 돌보셨나봐요. 멋진 아빠시네요. 파이팅!”이라고 말했다. 고열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던 멋진 아빠로 해석한 것이다. 그 아빠는 치켜올린 나의 엄지손가락을 보며 쑥스럽게 웃으면서 진료실을 나갔다.

방문진료를 나갔을 때의 일이다. 뇌경색 이후 몇년째 침대에 누워서 생활 중인 70대 남성이라고 들었다.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이 있던 분이었는데, 당뇨가 잘 조절되지 않던 중에 뇌경색이 발병했다고 들었다. 몇년째 누워만 지내시다 보니 팔다리의 근육은 약해지고 관절은 굳어져 있었다. 굳어진 팔 관절을 간신히 펴서 혈액검사를 해 확인한 그분의 당화혈색소는 5.6이었다. 당뇨는커녕 당뇨 전 단계에도 해당되지 않는 완벽한 정상 수치, 믿기지 않는 수치였다. 잘 조절된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인슐린까지 맞고 있는 분의 당화혈색소 수치라기엔 턱없이 낮았다.

혈당을 조절하는 목표는 그분의 연령, 앞으로의 기대 여명, 합병증 발생 정도를 놓고 정하게 되는데, 일단 연령이 70세 이상인 데다, 저혈당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여 자기 발로 걸어서 뭘 먹으러 갈 수 없는 와상 환자이니, 혈당은 그보다 훨씬 높은 정도로 조절이 됐어야 했다. 그분의 자녀는 아버지의 혈당이 높아져 뇌경색이 왔다는 생각에 혈당 조절을 철저히 하는 걸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혈당 조절을 철저히 하려다 보니 드시는 칼로리가 점점 줄어들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방문했을 땐 그 남성분은 거의 영양실조 상태였다. 가족들을 설득해 식사량을 늘리고 특히 단백질을 늘려야 했다. 이렇게 돌보면 어떻게 하느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지식 내에서 아버지의 혈당을 조절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온 자녀의 마음을 읽어줘야 한다.

환자의 통증이나 어려움을 알아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환자/보호자의 노력을 해석해 주는 것은 더 중요하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해석해주는 것이야말로 환자/보호자를 건강의 주체로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노동>이란 책에서 영국의 의사들은 “1차 의료 의사들은 그 사람 자체로서 치료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네 의사들은 특별한 약도 처방하지 않고, 중요한 수술도 하지 않지만, 건강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기 때문에 치료제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교사들은 그 사람 자체로서 교육재일 수 있다.

진료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해석하기 싫어졌던 때가 있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는데 “안녕하지 못하니까 병원에 왔죠”라고 대답을 하시든 말든, 아픈 몸과 마음을, 건강해지려고 하는 욕구를 애써 읽어내려고 해왔던 노력을 하기 싫어졌을 때, 나는 이것이 ‘번아웃이구나’라고 해석했다. 다행히 번아웃을 해석할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나 보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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