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비움의 쓸모
여러 끼니 끝에 자리를 제대로 차지한 잔반 사이로 이제 막 저녁거리로 삼다 남은 음식을 밀어 넣었다. 요 며칠 이별이 길어지고 있는,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는 음식들로 채워진 냉장고 안의 잔상이 청구서 금액의 동그라미 수만큼이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먹을 것의 귀함을 알고 자랐기에 음식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책임과 의무감으로 하루 두어 번 밖에 안되는 배고픔에 대한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것도 억울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냉장고는 점점 음식들로 채워진다.
장롱 한 짝만 한 냉장고의 넉넉함이 과욕의 한계치를 높이고 있다는 애먼 탓을 했다. 음식을 오래 둔다고 골동품처럼 가치가 생겨나는 것도 아닌데 애써 보관하고 있는 미련함 탓도 했다. 풍요에서 잉여를 만들어 내는 삶의 방식이 문제다. 풍요 그 자체를 효용 가치로 두고 있으니, 큰맘 먹고 냉장고를 정리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가득 채워질 것이 뻔하다.
욕구와 희소성의 상관관계를 정리한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의 측면에서 보자면 비움을 통해 희소성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족감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니멀리즘’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비움을 통해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에릭 사티의 음악을 듣는다거나 동양화의 여백이 갖는 의미를 통해 비움의 쓸모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정갈한 나물 무침 한 젓가락에서도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미니멀 라이프’라는 삶의 방식으로 발현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비움은 만족감을 높이거나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희소성의 가치를 만든다.
그리고 비움을 통해 얻은 여유는 기능적 한계치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인체의 신비를 예로 들면 우리는 평생 뇌의 절반도 사용하지 않는다. 평상시 폐는 십분의 일, 심장은 오 분의 일만큼만 사용한다. 그리고 신장이나 간은 일부를 누군가에게 떼어 주더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의 폐는 일상의 신진대사를 위한 폐활량과 격한 움직임을 할 때의 폐활량이 열 배까지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만약 폐가 일상의 호흡에서 한계치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달리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의 몸조차 한계치의 절반 이상을 비워둔 채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다.
비움의 미학이 담긴 전통 춤사위가 있다. 예로부터 춤은 영남, 소리는 호남이라는 말이 전한다. 지역적으로 뛰어났던 문화 예술 분야를 일컫는 말이며 상대적으로 부산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서 주로 춤을 즐겼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영남 지역의 다양한 전통 춤에는 덧뵈기라는 독특한 춤사위가 있는데 부산의 들놀음 한량무 학춤, 그리고 고성과 통영의 오광대, 밀양백중놀이 등에서 덧뵈기는 춤사위의 골격이자 모든 동작을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덧뵈기 춤사위를 질그릇에 비유해서 설명하곤 한다.
우선 투박한 멋이 그렇다. 여타 전통 춤이 궁중의 잔치나 의례 또는 무속으로부터 발전해서 전문가를 통해 향유되었던 반면에 덧뵈기춤은 일반인의 삶 속에서 생활의 일부로 향유되었다. 달이 가득 차 흥도 가득 차올랐던 밤에 유희의 몸짓으로, 나쁜 기운을 힘차게 밟아 몰아내던 의로운 몸짓으로 그렇게 삶 속에서 치레 따위나 세련미 없이도 멋스럽게 즐겼던 춤이다. 영남 춤은 덧뵈기로 시작해 덧뵈기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춤사위가 아니기에, 동작과 표정 하나 빠짐없이 갖춰 놓은 춤사위가 아니기에, 추는 이마다 다른 몸짓과 그 몸짓에 삶의 희로애락을 담을 수 있는 점 또한 질그릇과 많이 닮았다.
얼마 전 한 명인의 공연이 있었다. “오늘은 최대한 비우고 시작하겠다”고, “무대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나이가 들고 나서 깨달았다”고 그는 말했다. 오늘 새로운 무대를 위해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더 연주했을 장구·꽹과리 가락과 그 가락에 추던 춤사위를 버린다는 다짐. 그런 명인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나는 우선 냉장고부터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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