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번 ‘달라져보는 경험’이 주는 힘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배우는 자의 무기력이다. 무기력에는 대책이 없다. 배우겠다는 의지를 냈을 때 감당해야 하는 모욕과 좌절, 절망이라는 상처를 당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갑옷이 무기력이다. 생존에 실패해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생존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 무기력이다. 무기력이라는 갑옷 안에 웅크린 학생을 밖으로 꺼낼 방법은 없다.
왜 무기력할까. 무기력에는 더는 절망하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이 있다. 배움과 성장에서의 절망이란 아무리 뭘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는 좌절이다. 그렇기에 무기력에서 꺼내기 위해서는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변할 수 있음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탈락해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내가 변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좋게 변할 수 있음을 체험하면서 변화 가능성을 긍정할 때 무기력이라는 갑옷에서 조금씩 나올 수 있다.
‘무기력’이 단단한 갑옷 될 때
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메이크업이나 스타일링 같은 작업이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에게 의외로 큰 동기부여가 될 때가 많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말이다. 스타일링 전문가가 와서 무기력한 학생들에게 옷 입는 것과 머리 만지는 것, 그리고 메이크업으로 표정을 바꾸고 자세를 다시 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경험하게 하는 것이 놀라운 효과를 보여줄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한 베테랑 국어교사는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아마 그것이 지금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내가 달라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사람은 자기 내부에 있는 역량을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달라지는 과정의 경험이 달라질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게 한다. 한번 달라진다면 계속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지는 것을 추구할 수 있다. 그 추구의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달라짐의 경험은 이렇게 사람에게 달라질 수 있는 역량을 증진하게(임파워먼트) 한다.
이번 학기에 학생들이 올린 마지막 공연인 <장소>는 배우면서 성장이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을 밥벌이로 삼는 나에게 그 ‘임파워먼트’의 과정(과 위험함)을 교과서처럼 보여줬다. 진부한 말인 것 같지만 임파워먼트가 되기 위해서는 드러내고 싶은 자기를 만나야 하고, 그걸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그런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있어야 한다. ‘우리’ 학생들에게 <장소>는 딱 그런 공연이었다.
학생들은 문자 그대로 무대 위를 날아다녔다. 연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에 뿌연 먼지가 쉴 새 없이 피어올라 가라앉지를 않았다. 독서운동을 하는 활동가와 국어교사를 중심으로 한 관객은 연극이 끝난 뒤 한목소리로 평가했다. “이 연극은 학생들만 할 수 있어요. 전문 배우가 했다면 아무리 연기를 잘했더라도 오글거렸을 것 같아요.”
‘내 안의 흑염룡’이 꿈틀거리는 허세 청소년들
<장소>는 자이니치(재일 조선적) 극작가/연출가인 김철의 작가의 작품이다. 일본 황금기이던 쇼와 시대에서 ‘잃어버린 30년’으로 지칭되는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 1980년대 말, 오사카의 조선학교(고등)에서 조선‘적’ 자이니치 청소년들의 방황과 성장을 다뤘다. 김철의 작가는 “우리에겐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에서 일본 사회에서 겪는 차별이나 억압을 자이니치 청소년들의 학교생활과 ‘사랑’ 문제로 다뤄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적어도 세 차원의 이야기가 중첩돼 있다. 첫째는 요나하 준이 <헤이세이사>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 사회 전체가 시대에 대한 공통감각의 해체가 시작되던 때라는 배경이다. 과거라면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오직 ‘자이니치’라는 정체성만 존재하고 그 정체감만을 의식적으로 고양하며 살아야 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 각자 ‘개인’으로 해체되며 무엇으로 살아갈지를 고민하기 시작한 시기다. 극에 나오는 말대로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서로 말도 안 통하게 되”고 서로의 “사고방식이나 말이 짜증” 나게 될 것이다. 단적으로 똘똘 뭉쳐(뭉칠 수밖에 없어) 하나이던 자이니치는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연극은 결코 개인으로 해체될 수 없는 자이니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자이니치는 자이니치다. 일본 사회까지 그들을 개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선호(작중 인물)가 다시 가야금을 타는 동창 모임을 하는 장소가 전철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라이브카페라는 것이 상징적이다. 장소성이 부정된 자이니치에게 허락되는 만남의 공간은 언제나 특정 시간대의 특정 전철, 부유하는 골목, 그리고 전철 밑 라이브카페와 같은 ‘이동성’의 공간뿐이다.
동시에 이 연극은 ‘허세’로 가득한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관객이 이 연극을 전문 배우가 아닌 학생들이 했기에 그 정서가 제대로 살았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학생들이 날아다닌 이유도 이게 자신이 거쳐온 자기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내 안의 흑염룡’이 꿈틀거리는 ‘중2병’이라는 말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과잉된 자의식과 그에 따른 허세. 그 시기를 거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즉각 자신의 오글거리는 추억을 떠올리는 만국 공통의 청소년 특징이 아닌가.
이를테면 일본 고등학생에게 망신당하고, 친구들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생각하던 주인공 장소가 자기를 때려눕힌 일본 학생에게 재대결을 요구하는 날이, 사랑하던 선화가 도쿄에서 가야금 경연에 나가는 날이었다. 장소는 선화에게 “내가 이길 테니까 너도 가야금을 계속해”라고 말하고, 일본 학생에게는 ‘계왕권’을 수련했다며 “좋아하는 여자가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니까”라며 다시 싸우자고 한다. 허세다. 그런데 이 허세가 무대를 가득 채우면서 자이니치의 현실, 조선학교,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넘어가는 시대의 특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간극’을 넘어 연극에 몰입하게 했다.
‘짐승의 심장’으로 무대에서 우당탕탕
이 희곡을 받아보고 군성 역을 맡은 박천휘씨와 주인공 장소 역을 맡은 김경환씨는 ‘우리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자이니치도 모르고, 헤이세이도 모르지만, 이 청소년‘기’의 마음만큼은 자신들이 거쳐온 바로 그것이라고 단박에 알았단다. 그들만이 아니라 배우들 전체가 그랬다. 그들은 이 연극만큼은 ‘짐승의 심장’으로 연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연습 지도에 들어갔던 교수들이 “너무 시끄럽다”고 혀를 내둘렀고, 허세로 인한 폭력이 난무하는 연기를 하며 부상자가 속출했다. 한 명은 어퍼컷(올려치기)을 맞고 실신해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했다. 공연 내내 무대가 먼지로 뿌연 이유가 있었다.
학생들은 이 연극에서 늘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자기들의 이야기/얼굴을 만났고, 그 이야기/얼굴이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온 힘을 다해 무대를 날아다녔다. 김철의 작가가 이 작품을 쓰며 한 말 “우리에겐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는 그 말이, 자이니치 조선학교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25년의 세월을 넘어 한국 청소년들을 임파워먼트하는 말이었던 셈이다. 자신들이 거쳐온 경험들의 이야기로서 강점과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제대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부상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연기를 연마했다. 그를 통해 학생들은 달라졌다. 이 과정에서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태도를 가지는 거야말로 가장 큰 열매일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하는 사람은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장소>가 아무리 청소년들의 허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헤이세이로 넘어가던 쇼와 마지막 시대, 일본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자이니치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이니치로만 살아갈 수 있는 그들에게 “그 3년간의 허세가 평생을 좌우”하며 그 허세로 “조고(조선고등학교)는 전설을 만들어”왔지만 쇼와 끝 무렵에서 “전설의 입구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전설의 출구에 설 수도 없는” 그들의 처지에서 “저희만의 허세로 이어나가야만” 한다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학생들에게 경고하곤 한다. 내가 동일시하는 이야기로 내가 연출하고 연기해야 하는 이야기의 타자성을 삼켜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임파워먼트의 위험성, 식민주의다. 이 이야기를 식민주의적으로 한다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일이 있겠는가?) 이야기가 보편적이자 동시에 이야기로서 고유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알지 못하는 타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드라마는 모두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단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모두의 이야기가 위대한 드라마다.
이를 위해 몇몇 학생에게 요나하 준의 <헤이세이사>를 간략하게 공부하며 연극 중간에 나오는 대사가 어떤 의미인지를 소개하고, 그런 맥락에 놓인 사람의 말은 어떤 감정일지 토론하게 했다. 이 연극에 왜 ‘전철’ ‘철도 아래 라이브카페’ ‘골목’ 등이 나오는지를 디아스포라의 장소와 장소상실, 그리고 모빌리티라는 개념으로 더듬어보기도 했다. 전체 학생에게는 성공회대 조경희 교수를 초청해 강연을 듣게 했다. 알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모른다는 감각을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이 모른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 감각, 그것이 타자성을 향한 탈식민적 감각이 아닐까?)
사람은 언제 어려움을 감수하는가
이 과정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게 했다. “사람은 언제 어려운 이야기를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는가?”라는 문제다. 이론수업만 하면 10분도 되기 전에 자버려 모든 이론수업을 없애버리기까지 한 학생들이 <장소와 장소상실> <원시적 열정> <경계에서 만나다> 등 듣도 보도 못한 어려운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왜 눈을 반짝이게 됐는가? 표현하고 싶은 자기가 있었고, 그것만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하기 위해 그들은 정말 배우고 싶어 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쉬운 이야기’인가? 혹시 동일자를 넘어 타자성에 닿아 ‘달라지고 싶다’는 그들의 갈망, 그 도약을 향하는 ‘어려운 이야기’인 것은 아닐까?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