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민정’이란 칼 너무 쉽게 버렸다

박찬수 2023. 7. 2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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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04
사직동팀과 민정수석실 ②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정(民情)’은 국민의 생활과 생각을 살핀다는 뜻이다. 동양 통치철학에선 민정을 매우 중요시했다. ‘민심이 곧 천심’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조선 시대 왕이 평복을 입고 백성들이 사는 곳을 돌아보는 건 요즘 말로 하면 ‘민정 시찰’이다.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지방 관리들의 실정과 비리를 단죄한 건 ‘공직자 사정(司正)’이다. 둘 다 국민의 삶을 좀 더 편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대통령 비서실에서 이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 조직이 민정수석실이었다. 그 점에서 민정수석실이야말로 대통령이 ‘제왕’과 비슷한 존재임을 상징하는 기구일 수 있다.

그런데 국민의 삶과 뜻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왕의 잠행(潛行)이나 암행어사 파견은 드문 일이다.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선 상시로 국민 목소리를 듣고 정책과 주요 현안 결정에 반영하는 게 긴요하다. 바로 여기서 ‘정보’의 필요성이 생긴다. 정부가 국민 생각을 알아내는 과정이 곧 ‘정보 수집’인 셈이다. 하지만 정보 수집이 광범위할수록 개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정보 정치나 민간인 사찰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민정의 야누스적 속성은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지난해 인수위 시절 민정수석실 폐지를 발표하면서 김은혜 인수위 대변인은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구상”이라고 밝혔다. 민정수석실이 ‘제왕적 대통령’의 상징처럼 비치는 건 권력기관들을 조율하기 때문이다. 흔히 민정수석실을 ‘ㄱ자 기관을 관할하는 조직’이라고 말한다. 검찰, 경찰, 국정원, 국세청, 국군방첩사령부(옛 기무사)의 첫 글자가 ‘ㄱ’으로 시작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감사원은 헌법기관이지만 현실에선 대통령실과 밀접하게 소통하면서 움직인다. 모두 칼을 휘두르고 정보를 다루는 ‘권력기관’들이다. 과거엔 매일 아침 민정수석실 책상에 국정원, 검찰, 경찰, 기무사, 감사원, 국세청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요즘은 꼭 그렇진 않겠지만, 권력기관들이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열심히 뛰는 건 마찬가지다. 양날의 칼이 되지 않으려면 선을 넘지 않겠다는 의지와 절제력이 긴요하다. 하지만 그 선이 어디까지인지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다.

정보의 욕구는 바깥에서 대통령실을 바라보는 이율배반적 시각과도 연결돼 있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많은 인사는 “외부에선 대통령실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모든 정보를 다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이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우리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알게 되는 사안이 많다. 그걸 미리 알려면 사찰 논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른다’고 하면 ‘대통령실이 그것도 몰라? 무능하네’라고 비판한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모두 견뎌낼 수 있어야 불법 사찰, 정보 수집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역대 정부를 보면 권위주의 성격이 강할수록 민정 기능도 막강했다. 대통령실에 ‘민정’이란 조직이 처음 등장한 건 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다. 1963년 비서실에 민정수석직을 처음 만들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했기에 박 대통령은 여론 동향에 훨씬 민감했다. 처음에 2급이던 민정수석은 1968년 장관급으로 격상됐다. 박 대통령이 3선 개헌(1969년)을 통해 장기집권을 꾀하던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민정 기능이 가장 활발하고 확장됐던 건 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때다. 10명의 청와대 수석비서관 중 무려 3명(민정수석, 사정수석, 법무수석)이 ‘민정’ 관련이었다. 5공 때 민정 기능을 대폭 확대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통성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정보와 사찰, 사정의 칼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비서실의 민정 기능은 1993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축소됐다. 3명의 수석비서관이 1명(민정수석)으로 줄었다. 윤석열 정부 이전까지 역대 민정수석실은 대체로 민심을 살피는 고유한 기능인 민정, 공직자 비리와 대통령 친인척을 담당하는 사정(또는 반부패), 인사 검증과 대통령실 내부 감찰을 하는 공직기강, 대통령의 법률 보좌를 맡는 법무 등 4개 비서관을 뒀다. 이름은 조금씩 바뀌고 정권에 따라 민정·사정 기능을 통합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민정·사정 기능을 함께 맡은 우병우 민정비서관은 그래서 ‘왕 비서관’으로 불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정수석실을 없애고, 공직기강과 법률(법무) 비서관만 비서실장 직속으로 옮겼다. 인사 검증은 최측근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 산하로 보냈다. 대통령실의 인사검증 기능을 독립기관도 아닌 특정 부처로 보낸 건 유례없는 일이다. 민심을 살피는 민정 고유의 기능과 대통령 친인척 관리는 담당 부서가 모호해졌다. 공직자 감찰 기능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민정수석실=사직동팀’으로 너무 협소하게 바라보면서, 민정 본연의 목적인 국민 목소리를 듣고 권력형 비리를 감시하는 기능은 현저하게 위축됐다.

물론 국민의 소리를 듣는 게 꼭 민정수석실만 하는 일은 아니다. 국정상황실이 있고 정무수석실이나 홍보수석실도 있다. 그러나 성격은 다르다. 과거 청와대에서 민정 업무를 담당했던 핵심 인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가령 어느 지역에서 큰 사건이나 사고가 터지면 그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곳이 국정상황실이다. 사건 이후에 민심의 흐름이나 주민 민원 등을 파악하는 게 민정수석실이다. 언론에 보도된 여론과 의견은 홍보수석실이 수렴하고, 정치권의 대응은 정무수석실을 통해 전달된다. 이렇게 모인 여러 정보와 의견이 대통령 또는 비서실장 주재 회의에서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분석돼야 정확한 대응을 해나갈 수 있다.”

최근 집중 호우 사태에서 보듯, 대통령이 국민과 공감하지 못하고 따로 움직이는 모습을 자꾸 보이는 건 민정 기능의 난맥과 관련이 있다. 전쟁 지역인 우크라이나를 극비 방문하면서 언론은 제외했어도 김건희 여사를 동행한 건, 그가 대통령의 핵심 조언자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니 처가를 비롯한 친인척 관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내부에서 하기 힘들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친인척 비리를 감시하는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지 않고 있다. 전임 문재인 대통령 역시 특별감찰관을 두지 않았다. 전·현직 대통령실 모두 ‘국회에서 여야가 협의해 추천하면 임명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통령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여당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나마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실에 친인척 관리팀을 따로 뒀다. 윤 대통령은 이 기능을 아예 없앴다. 대통령 처가 땅과 인접한 양평고속도로 논란이 커진 건 친인척 관리 공백과 무관하지 않다.

공직 감찰이 중요한 건 ‘관료주의’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공무원들이 임기가 정해진 대통령 지시를 꼭 잘 따르는 건 아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로널드 레이건은 부처 공무원들이 우선하여 충성하는 대상은 장관이 아닌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봤다. 공직 사회가 대통령을 바라보도록 긴장감을 불어넣는 게 공직 감찰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도 2023년 1월 뒤늦게 대통령실과 국무총리실에 공직자 감찰조사팀을 구성했다. 과거 민정수석실에서 하던 공직 감찰·사정 기능을 부활한 셈이다.

내로라하는 권력기관을 관장하는 조직, 고위공직자를 감찰하는 조직,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조직, 그 과정에서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위태로움은 어쩌면 권력의 숙명일 수 있다. 그 점에서 한 인사는 민정수석실을 ‘와파린과 같은 존재’라고 비유했다. 와파린은 혈액 속 혈전을 막아주는 항응고제다. 덜 쓰면 혈관이 막히지만 과용하면 작은 상처에도 심한 출혈을 부른다. 그렇다고 와파린을 아예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김대중 청와대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김성재 전 한신대 교수는 임명장을 받은 다음날 김 대통령과 관저에서 조찬을 함께 했다. 그때 김 대통령이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

다. “내가 다른 건 김 수석에게 부탁할 게 없고 우리 아들들과 친인척,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특히 관리 좀 잘 해주게.” 민정수석에게 특별 당부까지 했지만, 임기 말 김 대통령의 세 아들 중 둘은 사법처리를 피하지 못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하고 역대 대통령 누구도 본인이나 가족 또는 최측근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장모가 법정구속됐다. 그런데도 권력형 비리를 감시하는 조직을 대통령실에 두지 않는 건 그만큼 깨끗하다는 자신이 있어서일까, 궁금하다. 

박찬수 I 대기자 pcs@hani.co.kr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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