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옆 묻어주오"… 캐나다 형제, 佛 소년병 부산에 잠들었다
장맛비 흔적이 촉촉이 내려앉은 지난 24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 이곳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정문을 지나면 오른쪽이 추모관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추모객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추모관에서는 한 외국인 가족이 유엔기념공원 조성 이야기를 담은 동영상을 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유엔군 참전 용사였던 할아버지의 자취를 찾아 부산까지 왔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자 광활한 잔디밭에 빼곡히 자리 잡은 묘지 수백 개가 눈앞에 펼쳐졌다. 또 다른 외국인 가족이 묘지 앞에 서서 고인을 추모하고 있었다.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참전 용사의 손자와 증손녀라고 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할아버지를 기억하려는 그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빛나고 있었다.
추모관 앞에 새겨진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유난히 또렷했다. 6·25전쟁 때 유엔 22개국에서 전투 병력과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참전한 유엔군 병력 중 4만1000여 명이 희생됐다. 이들 중 11개국 2320명이 유엔기념공원에 영면해 있다. 육신과 함께 온갖 기구한 사연도 묻혀 있다.
한곳에 묻혀 있는 허머스턴 부부. 허머스턴 씨는 호주군 장교였다. 간호사로 일하던 부인과 결혼식을 올리고 3주 만에 한반도 파견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전사했다. 장교 허머스턴은 유엔기념공원에 묻혔다. 남편이 전사하자 부인은 평생 자식도 없이 봉사하며 홀로 살았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부인은 "남편 곁에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인의 시신은 호주를 떠나 남편 곁인 유엔기념공원에 합장됐다. 나란히 묻혀 있는 허시 형제는 캐나다 출신이다. 동생이 먼저 6·25전쟁에 참전하고, 형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 형이 전사하고 동생은 살아남았다. 세월이 흘러 노약해진 동생은 형과 함께 유엔기념공원에 묻히길 희망했다. 지금 형제는 유엔기념공원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미국 참전 용사 러셀 해럴드 존스태드 씨는 1950년 12월부터 1952년 6월까지 헌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고, 이때 다리를 다쳤다. 하지만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한민국에 남아 주한 미군으로 계속 복무했다. 한국에서 복무하면서 한국인 여성을 만나 1961년에 결혼했다. 결혼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그는 제대 후 미국 정부가 상이군인에게 지급하는 보상금을 거절했다. 국민 세금이 더 중요한 곳에 쓰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유엔기념공원 안장도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안장돼야 한다며 망설였다. 하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희생을 뜻깊게 생각한 가족이 그를 설득했고, 2020년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프랑스 참전 용사 로베르 피크나르 씨는 프랑스군 중 최연소인 만 18세 나이로 6·25전쟁에 뛰어들었다. 1952년 9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화살머리고지와 중가산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 남은 생을 살았다. 하지만 죽어서는 전우 곁인 유엔기념공원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는 지난해 이곳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마티아스 후베르튀스 호헌봄 씨는 네덜란드 참전용사다. 그는 1952년 5월 참전했다. 전쟁통에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치안 유지 임무 등을 맡았다. 그는 생전에 "전쟁이 사람들에게 준 고통과 한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똑똑히 봤다"며 "대한민국이 재건을 시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도왔다"는 말을 남겼다.
또 다른 네덜란드 참전 용사인 엥버링크 씨는 1952년 2월 참전했다. 그는 거제도에 자리 잡은 박격포반의 발사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한국에서 복무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컸다. 그는 살아생전 전우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뜻을 지속적으로 밝혔고, 지난해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국가보훈부는 2015년 유엔 참전 용사 본인과 유가족의 희망을 받아 유엔기념공원 사후 안장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14명의 유해를 부산으로 모셔왔다. 추모관 밖 묘역 배치도에는 수백 명의 전사자 이름과 사진이 새겨져 있다. 국가별로 보면 영국 참전 용사가 890명으로 가장 많다. 그 뒤를 이어 튀르키예(462명), 캐나다(381명) 순이다. 호주 출신 참전 용사도 281명이 안장돼 있다.
[부산 박동민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교실 금쪽이들은 박사님 때문?”…오은영 SNS 난리난 이유 왜? - 매일경제
- “신원 미상男 KTX 선로 무단 진입 사망”…서울지하철 1호선·KTX 지연 - 매일경제
- 인터넷 최저가보다 더 싸다…“반값에 샀어요” 품절대란 몰고온 ‘공구’ - 매일경제
- 제주 줄고, 일본 늘자…전국 지자체 “여행비용 줄게” 손짓 [여행가중계] - 매일경제
- “20년 잊고 살았더니 대박”…묵히니 금 됐다, 11배나 오른 펀드는 - 매일경제
- [단독] ‘국대’ 삼성의 새로운 무기 나온다…로봇시장 대격변 예고 - 매일경제
- “‘뛰지마라’는 엄마, 정작 이웃은 나를”…초등생의 호소문, 무슨일이 - 매일경제
- ‘피겨여제’가 가장 가고 싶어한 이곳...한폭의 그림, 어디길래 - 매일경제
- “오래 기다렸습니다”…드디어 출발선에 선 재건축, 변수는 ‘공사비’ - 매일경제
- 제일렌 브라운, 보스턴과 3억 400만$ 계약 연장...NBA 최대 규모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