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탱機 타고 124회 출격 …"살아 돌아오겠다 생각한 적 없어"

김성훈 기자(kokkiri@mk.co.kr) 2023. 7. 25. 17:2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군의 살아 있는 전설' 최순선 예비역 대령
"항상 유서 써놓고 조종간 잡아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생각만"
351고지전·승호리 철교폭파…
6·25 전승작전 기여 '무공훈장'
국내최초 보잉707·747 면허도
"국가 지키겠단 정신 놓지말길"

◆ 정전협정 70주년 ◆

최순선 예비역 공군 대령이 지난 23일 대전 자택에서 진행한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자신의 평생 비행시간이 기록된 대한항공 퇴직 기념 감사패를 소개하고 있다. 대전 이충우 기자

"일단 출격하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적의 대공망을 뚫고 폭격 임무를 마친 뒤 기지에 안착한 다음에야 비로소 '오늘도 살았다'며 안도했다."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최순선 예비역 공군 대령(92)을 대전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6·25전쟁 때 F-51D 머스탱 전투기를 타고 124회 출격해 전투를 치렀다. 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과 미국 비행십자훈장 등을 수훈한 영웅이다. 공군은 그를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부른다. 그는 삶과 죽음이 칼날처럼 맞부딪쳤던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며 여러 차례 감회에 젖었다.

최 대령은 강원도 351고지 공격 작전을 이야기할 때 가장 신이 났다. 최 대령이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당시 전투기 4대가 봉우리를 향해 출격했다. 상공에서 급강하해 목표물을 향해 돌진했다. 지상에서 나를 노리며 올라오는 불덩어리가 보였다. 겁이 났지만 이를 악물고 교육받은 대로 유효 사거리까지 내려가 폭탄을 던졌다"고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폭탄을 투하하고 곧바로 조종간을 잡아채 고도를 올렸다. 내려다보니 봉우리에서 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제야 명중이라는 걸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깜짝 놀란 편대장이 적진 상공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더라"고 덧붙였다. 351고지 공격작전이 성공해 속초, 양양, 고성이 남한 땅이 됐다. 이 작전으로 훈장을 받았다.

전투조종사 시절 전투기 앞에 선 최순선 예비역 공군 대령.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이야기도 꺼냈다. 승호리 철교는 인민군 후방 보급로의 요충지였다. 미군이 수차례 공격에 실패했는데 한국 공군이 나서 폭파에 성공했다. 그는 "인민군이 대공포를 무지막지하게 쏘아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고도를 낮춰 들어가 폭탄을 쏘았다"고 설명했다. 이 일로 한국 공군이 미군의 찬사를 받았다. 이 작전은 영화 '빨간 마후라'의 모티브가 됐다. '대공포 사이로 비행하는 게 무섭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최 대령은 "왜 겁나지 않겠느냐"며 "고공에서 기총을 쏘면서 내려갈 때는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해보자'는 심정뿐"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공군의 타격 목표는 적에게도 중요한 지점이라 수많은 대공포 공격이 있다. 그는 "그래도 임무를 받으면 출격해서 죽기 살기로 목표물을 맞혀야 한다"며 "출격할 때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항상 유서를 써놓고 조종간을 잡았다"고 말했다. 최 대령은 100회 출격 당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비행기가 강릉기지에 돌아오자 주민과 학생이 꽃다발을 들고 나와 환영해줬다"며 "그때 감회가 아직 생생하다"고 전했다. 또 그는 "장지량 장군이 큼직한 양푼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줬다"며 "단숨에 들이켜고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덧붙였다.

그는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한국군 전신) 산하 육군 항공대에 지원했다. 이후 조종간부후보생에 합격해 6·25전쟁 이전부터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하늘, 비행기를 좋아했다"며 "비행기를 타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에는 한국 공군에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 전투기는 고사하고 연락기와 T-6 훈련기가 전부였다. 1949년에 빈약한 공군력을 보강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펼쳐졌고, 그렇게 모인 국민 성금으로 훈련기 10대를 '건국기'라는 이름으로 도입했다.

조종간부후보생이 되고 얼마 안 돼 6·25전쟁이 터졌다. 그는 "휴가를 받아 고향 대전에서 맞선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전쟁이 터졌다"고 말했다. 방송에서 "이북이 남침을 시작했다. 휴가 장병은 즉시 원대 복귀하라"는 말이 나왔고, 그 소식을 들은 최 대령은 즉시 부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2년 후인 1952년 5월 공군 소위로 임관해 강릉기지에 배치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전투기는 머스탱이었다. 그 머스탱을 타고 전선에 투입됐다. 전쟁이 끝난 뒤 최 대령은 공군에서 전투기를 타고 4500시간 동안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1970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 그는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그리고 민간 항공기 조종사로서 국내 최초 기록을 써내려갔다.

1975년 대한항공이 보잉 707기를 도입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국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1년 만에 보잉 707기의 미국항공면장(면허)을 받았다. 국내 최초였다. 그는 "면허를 받는데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1978년에는 회사가 보잉 747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면허를 땄다. 40년 동안 군과 대한항공에서 총 2만6500시간을 비행했다.

그는 후배 전투 조종사를 향해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정신을 항상 뇌리에서 놓지 말고 그에 걸맞게 자신의 몸도 소중하게 단련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대전 김성훈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