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과학적'이라고 모두 '진리'는 아니다
● 그 시대의 수준을 반영하는 과학과 팩트
중학교 시절 영어를 배울 때 팩트(fact)는 '사실'이라고 배웠지만 최근에는 '사실' 대신 '팩트'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진 듯하다. 그래서 네이버 영어사전을 찾아 보니 '(특히 입증할 수 있는) 사실', '(지어낸 것이 아닌) 사실'이라고 나와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이라 나와 있으니 필자는 사실과 팩트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하기 위해 '과학'과 '팩트'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이게 진짜다’, ‘이제 진리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단지 그 시대의 과학 수준으로 볼 때 진리처럼 보일 뿐이다. 과학은 진리를 탐구해 가는 방법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가정할 경우 현 상태에서 가장 옳은 답을 보여주는 것이며 과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제시되는 경우는 흔히 있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등장하기 전까지 진리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연역법뿐이었다. 연역법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삼단논법은 이해하기 쉬운 것이 장점이지만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와 같이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대전제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대전제가 진리인지 아닌지를 결론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전제가 진리가 아니라면 논법 자체에 문제가 생기므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기원전 3세기경에 활약한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는 수학에서 5개의 공리를 주장했다. 유클리드는 이 5개 공리가 진리라 주장했고 다른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진리를 탐구했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서 진리가 된 것은 아니며 다른 학자들이 동의하므로 진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공리를 진리라 여기지 않으면 시작부터 대전제를 설정하기 어려우므로 삼단논법으로 진리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수 없게 된다.
영국에서 베이컨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새로운 주장을 많이 했다. 베이컨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이 세상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리와 원칙을 발견하자고 했다. 이러한 베이컨의 학문적 태도를 귀납법이라 한다.
그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 학자들이 당시의 학문세계를 한층 끌어올리면서도 잘못된 주장을 많이 한 것은 이론에 치우친 채 실험과 관찰을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실험과 관찰이 일반화한 것이 새로운 발견의 원동력이 되었다.
베이컨의 뜻을 따른 학자들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을 일반화하기 위해 여러 법칙을 정립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오늘날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연구방법이 보편화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진리가 끊임없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베이컨의 귀납법이 학문 발전을 가속화한 것이다.
● 귀납적 발견이나 추론이 진짜 진리일까.
문제는 베이컨이 주장한 귀납법으로 알아낸 새로운 발견을 두고 진리라 판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내가 관찰한 내용은 전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관찰한 것과 결과가 같을까?"
하늘의 별은 관찰하는 사람에 따라 위치가 달라지고 둥근 지구 위에서는 삼각형을 그리는 위치에 따라 내각의 합이 달라진다.(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평면에서의 이야기이고, 둥근 지구 위에서 항해를 하는 배는 각도나 방향이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땅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뉴턴(Isaac Newton, 1643~1727)에게는 왜 하필이면 사과가 지구 중심 방향으로 떨어지는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20대에 가진 그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뉴턴은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고 1687년에 발행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rincipia)'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표했다.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귀납적 추론에 의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아주 과학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인류가 모르고 있던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천문학과 물리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3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예도 존재한다. 18세기 말에 부인과 함께 직접 실험을 통해 화학발전에 공헌한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는 화학반응 전후에 질량의 합이 같다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주장했다.
그의 법칙은 200년 이상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졌지만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동의하지 않았다. 화학반응 전후에 질량이 같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미미한 차이를 잴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학반응시 열을 발산시키거나 흡수하는 반응은 에너지의 변화가 있음을 의미하며 ‘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광속의 제곱’(E=mc2)이니 질량에도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화학반응에서 질량변화를 크게 하면 에너지가 엄청나게 커지며 이를 응용한 것이 원자폭탄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학생들이 과학교과서에서 접하고 있는 질량보존의 법칙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자가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여 학계에서 주장을 했을 때 100%의 과학자들이 동의를 한다 해도 그것은 그 당시의 수준으로 볼 때 진리라는 것일 뿐 세월이 지나면 계속 진리로 유지될지, 새로운 진리가 그 내용을 대체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과학’이나 ‘팩트’라 하더라도 현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이의제기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아무리 진리라 해도 계속해서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통해 꾸준히 의심하고 새로운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학문 발전에 필요한 태도다.
● 지금은 진리가 아닌 과거의 진리들
○ 사례 1
2006년 8월 24일, 국제천문연맹 회의에서 명왕성이 태양계 9번째 행성의 지위를 잃고 행성에서 퇴출됨으로써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라는 태양계의 행성 첫 글자는 “수금지화목토천해”로 바뀌었다.
1930년에 미국의 톰보(Clyde William Tombaugh, 1906~1997)가 발견한 후 해왕성 밖에 있는 9번째 행성으로 받아들여졌지만 76년만에 행성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폭발되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명왕성 입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9번째 행성으로 이름을 올렸다가 다시 지워버렸다.
○사례 2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 입자를 원자라 한다. 영어로 원자를 의미하는 atom은 그리스어로 분할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atomos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Democritos)와 영국의 돌턴(John Dalton, 1766~1844)이 원자설을 주장할 때는 가장 기본입자인 원자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이클로트론과 같은 입자가속기로 원자를 쪼갤 수 있게 되었다.
원자가 전자,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이루어진다. 기술이 발전하면 과거의 정의는 바뀌게 되는 것이다.
○ 사례 3
의학은 과학의 한 분야라고 하는 이들이 흔히 있다. 의학을 공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적 소양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이와 같이 믿게 된 경향이 크다. 그러나 ‘의학은 과학적 연구방법을 이용하여 크게 발전한 학문이지만 과학의 한 분야이면서도 인문학적, 사회학적 내용이 포함된 학문’이라 해야 더 옳은 표현이다.
질병이 발생한 경우 어떻게 치료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학자들이 계속 연구를 하여 최선의 치료법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과거에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 치료가능한 질병으로 바뀌는 경우는 흔히 있다.
의학이 과학이라면 과학적 진리가 바뀌는 경우는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한다.
● 과학의 한계가 과학 발전을 자극한다
과학적 접근방법은 특정 사안에 대해서 판단 기준을 마련할 때 아주 유용한 방법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권에서 “과학”이라는 용어를 지금처럼 많이 사용한 예가 있는지 의문일 정도로 흔히 사용하고 있다.
그런 분들이 과연 과학의 한계를 알고 하는 이야기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방사성 동위원소를 연구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퀴리 부인과 그 딸은 방사성 동위원소 연구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방사성 동위원소의 부작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모녀 노벨상 수상자의 사망원인은 모두 방사성 동위원소의 부작용으로 추정되지만 정황증거만 있을 뿐 이로 인해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인과관계의 증거가 부족하다.
방사성 동위원소란 핵이 불안정하여 방사성 붕괴를 하는 원소를 가리키며 이렇게 붕괴될 때 알파선(alpha ray), 베타선(beta ray), 감마선(gamma ray)이 발사된다.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는 경우 어쩌다 한 번 방사선을 맞는 경우는 상관이 없지만 영상의학과에 근무하면서 매일 방사선에 노출되는 환경에서 일을 하는 분들은 납으로 된 보호복(납가운)을 입음으로써 방사선 노출을 줄이고 있다.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방사선은 세포를 죽일 수 있다. 암의 방사선 치료는 암세포를 죽이기 위한 것이지만 정상세포도 방사선을 받으면 죽게 되므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의학자들은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치료범위를 결정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이용하기도 한다. 국제학회에서 과학적 연구방법을 이용하여 발표하는 논문이 정반대의 결론을 내려 격한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는 흔히 있다.
1926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선정과정에서 승자로 남은 피비게르(Johannes Fibiger, 1867~1928)의 “스피롭테라 기생충이 암을 발생시킨다”는 건 오늘날 틀린 이론이지만 패자로 남은 야마기와 가스사부로의 “화학물질이 암을 발생시킨다”는 것은 오늘날 진리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의 과학은 현재의 수준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일 뿐 진리도 아니고 만능도 아니다. 올바른 과학적 태도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항상 열린 마음과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과학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1. Philip Stokes. 100 Great Philosophers Who Changed the World. Arcturus. 2021
2. 에브 퀴리. 아름답고 평등한 퀴리 부부. 장진영 역. 동서고금. 2000
3. 노벨재단 홈페이지(nobleprize.org)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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