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3사 중 유일하게 KBS에만 있는 이 직업 [강홍민의 굿잡]

2023. 7. 2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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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형선 KBS 라디오 PD

TV가 귀한 시절, 라디오는 유일한 세상과의 소통창구였다. ‘지지직~ 지지직~’ 주파수를 맞추는 예리한 손 끝 사이로 들려오는 라디오 속 성우의 목소리에 울고 웃는 그런 날들이었다. 그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라디오. 귀로 듣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충분했던 ‘라디오 드라마’는 변화의 속도는 느리지만 늘 우리 곁을 지켜왔다. 

국내 라디오 드라마의 역사는 70여 년을 훌쩍 넘었다. 그 중 KBS에서 제작 중인 ‘라디오 극장’은 세대를 아우르는 신파극부터 베스트셀러 소설까지 그동안 수백편의 작품을 오디오 드라마로 제작했다. 지상파를 비롯해 국내 방송사 중 유일하게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 중인 KBS에서 10년 넘게 라디오 극장을 제작하고 있는 황형선 PD를 만났다. 그간 백여 편이 넘는 작품을 만든 그를 통해 라디오 드라마 PD의 세계를 들어봤다.  

황형선 KBS 라디오 PD



예전만 해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드라마를 종종 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잘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아요. 
“라디오 드라마가 나가는 채널이나 방송 시간대가 많은 분들이 들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 그럴 거예요 지금 KBS에서 메인으로 나가는 채널이 북한인들을 대상으로 만드는 한민족방송으로 나가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실 겁니다. 물론 재방송은 다른 채널로도 나가고 있어요. 요즘에는 팟캐스트 전용 플랫폼인 ‘팟빵’이나 아이폰에서 다운받거나 스트리밍으로 들으실 수 있어요.” 

KBS 입사는 언제 하셨어요. 
“내년이 딱 입사한 지 30년째네요.” 

대학 졸업 후 바로 입사한 케이스인가요. 
“아녜요. 첫 취업을 정유회사로 했어요. 약 7~8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이곳으로 왔죠. 원래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십 수번 낙방 끝에 합격을 했어요. 마지막 도전이 운 좋게도 합격했죠.”  

왜 마지막 도전이었나요. 
“당시 신입공채 지원에 나이제한이 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도전해보고 안되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어요.” 

왜 라디오피디가 되고 싶었던 건가요. 
“정확히 말하면 입사할 때부터 라디오 드라마 피디를 하고 싶었어요. 입사지원서에도 희망업무에 라디오 드라마라고 적었던 기억이 나요. 그냥 어릴 적부터 라디오 드라마를 즐겨 들었고, 이걸 만들고 싶다 생각했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라디오 드라마를 희망하는 피디들이 많지가 않았어요.” 

"90년대 초반 언론사 시험 여러번 낙방 끝에 KBS 라디오 PD로 합격···2013년부터 KBS 라디오 극장 PD로 근무“ 



그럼 방송국 측에서도 잘됐다 싶었겠는데요. 
“그건 모르겠어요. 면접관 중 한 분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드는 선배였는데, 그 분 때문에 합격한 건지···.(웃음) 암튼 희망은 했지만 바로 들어가진 못하고 10년 전쯤 드라마를 시작하게 됐어요.” 

말씀하신대로, 요즘 젊은 분들은 라디오 드라마뿐만 아니라 라디오 자체를 접할 기회가 적은 느낌이에요. 다수보다 마니아층들이 찾아 듣는 콘텐츠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저희가 만드는 드라마 중에는 70여 년이 된 작품도 있어요. 그 세월동안 다양한 플랫폼, 콘텐츠들이 생겨났잖아요. 그래서 요즘 젊은 분들은 접할 기회가 사라진 것 같아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밀리의 서재나 윌라 같은 플랫폼에서 오디오 드라마를 기획해 서비스 하고 있거든요. 요즘 오디오 드라마 콘텐츠의 부흥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라디오 극장 제작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요. 
“어떤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지 정하는 게 첫 번째 입니다. 대부분은 기존에 책으로 나온 소설을 기반으로 하는데, 작가들이 쓴 창작 작품도 있습니다. 책을 기반으로 할 경우 우선 책을 선정해야죠. 저와 함께 일하는 각색 작가들에게 책을 추천받고 그 중에서 고릅니다.” 

제작 기간이 있으니 책 선정도 미리미리 해야겠군요. 
“그렇죠. 보통 3~4개월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지금(7월)은 11월에 방송에 나갈 작품의 대본작업이 끝난 상태예요. 저와 함께 일하는 각색 작가들이 9명 정도 되는데, 그 분들이 한 달 간 방송될 작품들을 작업하는 거예요.” 

한 작품 당 한 달 분량으로 제작되는 건가요. 
“네. 라디오 극장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해요. 한 작품 당 한 달 간 방송을 하고, 에피소드 당 20분 정도 나갑니다. 적게는 20회, 많을 땐 23회로 나눠 대본을 만들어요. 제가 작가들에게 주문하는 건 드라마이다 보니 내레이션보다 대사를 많이 넣어달라는 거예요. 아무래도 귀로 듣는 드라마이다 보니 집중하기에는 대화체가 훨씬 낫거든요.” 

“소설과 창작 작품 중 라디오 드라마에 맞는 작품 선정···최근 2차 저작물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 책 선정 쉽지 않아”

책 선정 이후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근데 이 책 선정도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후보군으로 올라 온 책들은 세 네 번씩 읽어보고 드라마로 제작이 가능할지, 재미나 가치가 있을지를 고민하거든요. 요즘 책의 경우엔 이미지가 부각된 소설들이 많아요. 라디오의 특징은 감정의 표현이거든요. 사람의 이야기가 진하게 묻어나는 작품이 (만들기에)좋아요. 그 이후에는 출판사를 설득해야 해요. 이것도 쉽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저작권을 출판사에서 가지고 있고 2차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 역시 논의를 해야 하는 부분이거든요. 요즘에는 소설책도 오디오북으로 제작해 판매를 하기 때문에 잘 안 해주려고 해요. 그래서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출판사에서 먼저 제작해달라고 요청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나 보네요. 
“요즘에는 소설이나 웹툰을 기반으로 한 영화, 드라마가 많다 보니 젊은 작가들의 경우 아예 영화를 전제로 쓰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허락을 받지 못한 책들은 모두 제 책장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어요. 영화 개봉한 뒤에 다시 제안하려고요.(웃음)” 

작품 선정 이후도 얘기해보죠. 
“작품을 정하고 각색이 끝나면 성우 캐스팅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 역시 중요한데요. 어떤 성우를 캐스팅 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아예 달라지거든요. 아시다시피 KBS에는 전속 성우가 있어요. 그럼 전속과 프리랜서들을 머릿속에 두고 배역에 맞게 캐스팅을 합니다.” 

“성우와의 호흡도 중요, 어떤 성우를 캐스팅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퀄리티 달라져···좋은 성우는 캐릭터를 공감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뛰어나야”

좋은 성우는 어떤 성우인가요. 
“타인에 대한 공감을 할 줄 아는 성우죠. 소설에는 굉장히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잖아요. 그 인물들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그 공감 안에는 연기력도 포함되고요.” 

그간 성우들과 작업을 많이 하셨잖아요. 피디님이 꼽는 최고의 성우는 누군가요.  
“워낙 훌륭하신 분들이 많아서··· 꼭 뽑으라면 설영범 선배님이 저에겐 최고의 성우이시죠. 저와도 몇 작품을 함께 하셨는데, 그분이 연기를 대하는 태도를 매우 존경합니다. 아주 진지하게 연기를 임하는 태도를 보면 저뿐만 아니라 성우 후배들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배님이시죠.” 

오는 9월에 라디오 극장에 방영될 '공포의 외인구단' 대본 연습 현장.



녹음현장은 어떤가요. 소리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콘텐츠라 아주 날이 서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서 녹음 전에 대본연습을 1시간 가량 하고 녹음에 들어갑니다. 아무래도 목소리로만 연기를 하기 때문에 녹음 땐 굉장한 집중을 요하거든요. 더군다나 현장 효과음을 만드는 ‘폴리사운드’도 스튜디오 부스 안에서 만들거든요. 연기자, 스태프들의 합이 원작의 스토리와 다 맞아야 하니까 호흡이 중요하죠.”  

10년 정도 하셨으니,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예전엔 카페 장면이라고 하면 카페엔 음악이 흐르잖아요. 그럼 긴 대사와 음악, 상황을 고려해 한 번에 연기해야 했어요. 중간에 NG가 나면 음악을 이어붙일 수가 없어서 원 테이크로 한 번에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죠. 근데 요즘은 후반작업으로 음악을 넣을 수 있어요. 그런 점은 편해졌죠.” 

라디오 피디들은 라디오 드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실 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기도 하고···. 일각에서는 라디오의 생명이 끝났다, 성우들의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고들 하는데 현실은 달라요. 요즘은 성우들의 전성시대입니다. OTT 플랫폼이 뜨면서 성우들의 일이 더 많아졌어요. 오디오 콘텐츠 역시 플랫폼화 되면서 오디오 드라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예요. KBS는 전속성우를 비롯해 녹음실 등 라디오 드라마 제작을 위한 모든 인프라가 갖춰진 유일한 곳이에요. 이런 장점을 후배들이 잘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직업병이라는 게 있나요. 
“녹음날이 월, 금요일이에요. 보통 대본회의를 하고 녹음에 들어가는데, 그 날은 혼자 점심을 먹어요. 녹음 전에 생각도 정리하고, 작품에 대해 한번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죠. 직업병인진 모르겠지만 습관처럼 돼 버렸어요.”


 
라디오 극장을 제작하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은요. 
“제 생각에 라디오 드라마 피디를 직업적으로 본다면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일과 일상의 분리가 안 되거든요. 늘 가방에는 2~3권의 책이 들어 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눈에서 책을 뗄 수 없죠. 물론 개인적으론 이 일이 좋아요. 재미있고요.(웃음) 보람된 순간이라고 하면 제가 생각한 작품의 캐릭터와 성우가 캐스팅이 잘 됐을 때예요. 그땐 정말 기분 좋습니다. 각색이 아주 잘 나왔을 때도 기분 좋죠. 근데 잘 나온 대본을 보면 스트레스도 받지만요.” 

왜 잘 나온 대본에 스트레스를 받나요. 
“그만큼 잘 만들어내야 하니까요. 하나 더 덧붙이자면, 팟빵에 잘 들었다는 댓글이 달릴 때요. 그럼 또 힘이 납니다.(웃음)” 

얘기를 들어보니, 이 직업은 예술적 감각도 있어야 하고, 엔지니어 마인드도 갖추고 있어야 하겠네요. 
“그렇죠. 기존의 소설이나 창작대본 중에서 어떤 스토리가 라디오 드라마에 적합한 지를 고를 수 있는 감각, 캐릭터에 맞는 성우 캐스팅, 녹음현장에서 성우와 스태프들이 합을 이룰 수 있게 조율하는 지휘자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감성들을 가지고 콘트롤할 수 있어야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몇 작품을 하신 건가요. 
“보통 1년에 12개의 작품을 하니까 중간 공백을 빼면 한 100여 편 정도 했겠네요.” 

그 중 대표작을 꼽는다면 어떤 작품인가요. 
“천명관 작가의 ‘고래’예요. 나온 지 꽤 된 작품인데, 최근에 부커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더라고요. 수년 전에 이 작품을 다뤘는데, 내용이 워낙 방대해 유일하게 두 달 간 방영을 한 작품이라 가장 기억에 남아요.”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예요. 출판사 대표님께도 연락드리고. 한강 작가에게도 메일을 보냈는데, 아직 답을 받진 못했어요. 이 작품을 너무 하고 싶어서 네 번 이상 본 것 같아요. 꼭 해보고 싶어요.” 

이 직업의 비전은 어떻게 보세요. 
“요즘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오디오 드라마와 같은 귀로 듣는 콘텐츠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어요. 그동안 시각적 콘텐츠에 많이 노출돼 있어 좀 더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는 오디오 콘텐츠가 사랑받는 것 아닐까 싶어요. 라디오 극장은 오랜 역사와 높은 퀄리티가 녹아들어 있는 콘텐츠예요. 앞으로도 청취자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 예정입니다. 참고로 오는 9월에는 레트로 감성을 살려 ‘공포의 외인구단’이 방송될 예정이에요. 들으면 놀라실 배우와 함께 말이죠.(웃음)”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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