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니면 또 언제 볼까”...13년만에 돌아온 거장의 세계 엿보기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7. 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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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 김범 개인전
회화 설치 등 70여점 전시
‘철망 통닭’‘임신한 망치’등
상상력 통해 현실을 전복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미술은 전복이자, 농담이다.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앞다퉈 소장하고 국내 젊은 작가들이 우상으로 꼽는 김범(60)의 만들어낸 미술관은 첫 인상부터 강렬했다.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입구에는 치타를 쫓는 영양의 모습이 거대한 스크린에 투사된다. 약자가 강자를 사냥하는 ‘전복’을 표현한 미디어아트 ‘볼거리’(2010)다. 미술의 세계는 이처럼 ‘무엇이든 가능한’ 상상의 세계다.

인터뷰나 전시가 드물었던 ‘은둔 작가’ 김범의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 세계를 포괄하는 최대 규모 전시 ‘바위가 되는 법’이 27일 개막해 12월 3일까지 열린다.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70여점을 선보이는 13년 만의 국내 개인전. 9월 프리즈 위크를 앞두고 ‘국가대표 사립미술관’이 강서경과 함께 세계에 선보이는 한국 작가다.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김범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작가다. 미술이라는 허구의 세계를 어떤 형식으로 가져올지 가장 많이 고민하고 가장 적게 보여주는 작가다. 13년간 국내에선 그의 작업을 볼 기회가 없었기에 좋은 만남이 될 것”이라면서 “보고난 뒤에도 여운이 남는 전시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통닭의 철망이 회화가 되는
미술이라는 ‘농담’의 세계
왼쪽 첫째 작품이 ‘철망 통닭 #1’. [리움미술관]
전시의 전반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농담’이다. ‘철망 통닭 #1’(1993)에서 건네는 질문부터 풀어보자. 닭을 튀기는 철망이 찢어진 캔버스의 중앙에 펼쳐져있다. 찢어진 모양이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머리에 떠오르는 그 먹음직스러운 친구가 정답이다. 캔버스 자체가 이미지가 되는 세계를 구현한 것. 통닭은 점점이 수를 놓아 희미한 통닭 형상을 표현한 ‘기도하는 통닭’ 등을 통해 전시 내내 주인공처럼 반복 등장한다. ‘벽돌 벽 #1’은 캔버스를 실로 꿰메 벽돌이 쌓인 담장처럼 보인다.

사나운 개가 벽을 뚫고 나온 흔적을 구현한 ‘두려움 없는 두려움’(1991)은 이번 전시의 사진 명소가 될 것 같다. 눈속임을 사용했지만 트롱프뢰유가 아니다. 화분, 도끼, 모종삽 등이 지시문과 함께 놓인 ‘하나의 가정’(1995)은 난폭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벽을 뚫고 나온 개를 표현한 ‘두려움 없는 두려움’ [리움미술관]
지시문을 활용한, 상상의 회화도 그의 전매특허다. ‘자화상’에는 사람은 간데없이 구멍과 주머니만 보인다. ‘풍경 #1’에는 그림 대신 파란 하늘과 나무, 강을 바라보라는 손글씨만 적혔다. 상상으로 감상하는 그림인 셈이다. 캔버스에 미로 퍼즐을 그린 ‘무제(친숙한 고통)’ 연작은 미로를 풀고 싶게끔 만든다. 주어진 문제와 바라보는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13번째 연작 작품은 높이만 4.91m로 전시 최대 크기를 자랑하며 홍콩 M+ 뮤지엄 소장품을 빌려왔다.
미로를 회화로 그린 ‘무제(친숙한 고통)’ 연작[리움미술관]
인지적 회화 연작도 관람객과 수수께기 풀이를 이어간다. ‘서있는 여성’ 연작, ‘누드’, ‘현관 열쇠’ 은 인물과 물체를 예상 못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그림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비튼다.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등 말장난 같은 작품들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는 실체를 의심하라.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
비명 소리로 그리는 회화와
돌에게도 말을 거는 ‘교육’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는 ‘교육의 재해석’이다. 생명이 없는 사물을 마치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물활론(物活論)은 김범의 중요한 세계관이다. 생산성을 상징하는 망치라는 공구가 배가 부른 모양으로 재해석된 ‘임신한 망치’(1995)는 허를 찌르는 해학을 보여준다. ‘무제(제조 #1 내부/외부)’는 마치 가면을 벗기고 해부한 사자 인형처럼 보인다. 실체외 내면의 간격을 표현한 작품으로 허술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정교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김범의 대표 연작 ‘교육된 사물들’(2010)은 2013년 아트선재센터 전시 이후 다시 관객들을 만난다. 미니어처 의자에 앉은 로프 주전자 저울이 수업을 듣는 교실을 구현한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2010) 앞에선 측은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칠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영상 속 얼굴의 절반만 비치는 인물이 바로 김범이다. 돌에게 정지용의 시를 낭송해주는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모형 배에게 지구가 육지로만 되어있다고 가르치는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 등은 교육과정의 맹점과 교육된 현실의 ‘부조리’를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리움미술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전시장 한 곳의 비명소리에도 놀라면 안된다. 힘껏 소리를 지르며 힘차게 노란물감을 붓질을 이어가는 배우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고 완성작은 실제로 전시한 ‘노란 비명 그리기’다.

전시 제목 ‘바위가 되는 법’은 작가가 쓴 책 ‘변신술’에 수록된 글에서 따왔다.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를 죽인다. 모든 계절과 기후의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라고 쓴 농담같은 글은 ‘멍때리기’가 미덕이 된 바쁜 현대인들에게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폭군을 위한 안전가옥, 전도를 위한 학교 등의 정교한 설계도를 그린 ‘청사진과 조감도’ 연작은 ‘보고 읽는’ 형식의 상상화로 억압과 폭력이 지배하는 인간 세계의 비관적 세계관을 담았다.

‘청사진과 조감도’ 연작 [리움미술관]
김 부관장은 “왜 지금 리움이 전시하냐고 묻는다면 의미있고 실험적인 김범의 작업을 국내에선 본사람이 많지 않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면서도 “2~3년은 구상해 신작품을 내놓는 과작의 작가에게 신작을 고민할 시간이 부족해 신작은 만나지 못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드로잉과 손글씨를 활용한 ‘개념 예술의 난장(亂場)’은 단순하고 소박한 전시 디자인을 통해 다채롭게 구현된다. 장식적이고 화려한 현대미술에 지친 이들에게는 낯설고도, 농담같이 느껴질 전시다. 전시를 관람하고나면, 광범위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상상력을 하나의 전시로 매듭지은 작가의 질문이 여운처럼 남을 것이다. ‘예술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관람료는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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