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포럼] 쌀과 밀가루

이영준 한국원자력연구원 정책연구부장 2023. 7. 2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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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 한국원자력연구원 정책연구부장

장바구니 물가가 심각하다. 대형할인점에 가서 몇 개 사지 않았는데도 10만 원이 훌쩍 넘어버려

카트에서 물건을 덜어내기 일쑤다.

특히 먹거리는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쌀값 관리에 집중하는 이유다. 쌀밥은 우리 밥상의 가장 기본적인 식품이다. 쌀값이 안정돼야 국민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공깃밥을 먹을 수 있다. 쌀은 가격뿐 아니라 안정적인 공급도 중요하다. 쌀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작은 문제에도 쌀 가격이 급등해 저소득층이 먼저 굶주림의 위기에 처한다. 2020년 국내 쌀 자급률이 92.8%까지 하락했을 때, 완전 자급에 가까운데도 정부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 비해 빵값은 서울이 전 세계 도시 중에 단연 1위라고 한다. 2위인 뉴욕에 비해서도 거의 2배 수준으로, 뉴욕과의 소득 수준을 비교하면 가히 살인적인 가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빵값이 비싸서 굶어 죽는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수요가 적어 빵을 만드는 밀가루 가격이 올라도 우리의 체감 정도는 쌀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하다.

반면 빵을 주식으로 하는 국가들은 상황이 반대다. 밀가루 가격이 조금만 올라도 식탁 물가가 들썩인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밀가루 수입 길이 막힌 이집트에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러-우 전쟁 중에도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 길을 보장했던 '흑해곡물협정'이 얼마 전 종료됐다. 러시아가 협정 종료를 선언한 이후 중동·아프리카 저개발국에서는 식량 위기에 따른 빈곤과 무력 충돌의 위협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국민에게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공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식탁의 주식(主食)을 자국에서 싼값에 직접 생산하는 것이다.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쉽게 구하고, 싸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에너지가 다르다. 중동을 보자. 흔히들 석유가 물보다 싸다고 한다. 당연히 석유와 가스가 펑펑 쏟아져 나오니까 석유나 가스가 산유국들의 주력 에너지원이 된다. 반면 태양광은 열사의 땅인 중동이라도 석유에 비해 비싸다 보니 상대적으로 덜 사용된다. 재생에너지는 중동에서 우리나라의 빵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빙하로 유명한 노르웨이는 빙하가 녹은 물을 이용한 수력발전으로 90%에 가까운 전기를 충당하고 있다. 북해에서 나오는 석유는 비싼 가격으로 주변 국가들에 팔며 주력 에너지원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노르웨이와 가까운 덴마크는 간발의 차이로 북해 유전이 영해에서 벗어나 노르웨이와 같은 호사를 누리진 못한다. 하지만 사시사철 안정적으로 불어오는 북해의 바람이 있어 바람개비를 이용한 풍력발전이 덴마크의 대표 발전원이 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를 보자. 우리나라가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에너지 빈국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상식이다. 장마철에만 집중된 비는 수력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람도 들쑥날쑥하고, 햇빛도 품질이 좋지 않아 재생에너지도 주력으로 사용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것은 석탄인데, 이마저도 품위가 낮은 무연탄으로 질 좋고 가격이 싼 외국산을 수입해서 쓰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우리에겐 '사람'이라는 인적 자원은 풍부하다. 미국 에디슨전기협회 회장을 지닌 시슬러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원자력은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라는 말을 전했듯, 기술이 핵심인 원자력은 우리나라에서 싸게 만들어 낼 수 있고,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이다.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이 기저부하로써 우리 산업의 주식(主食)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먹거리로 치면 우리나라에서 원자력은 쌀이고, 태양광, 풍력, 그리고 가스는 밀가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간혹 원자력은 비싸고 위험해서 나쁜 에너지이고, 재생에너지는 깨끗하고 안전해서 좋은 에너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싼값에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쌀이 우리 식탁의 주식이 된 것처럼 에너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환경에 맞춰 어떤 에너지를 주로 쓰고, 다른 에너지를 얼마큼 사용할지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쌀과 밀가루 중에 어떤 것이 좋고 나쁘냐를 논하지 않는 것처럼, 에너지를 좋고 나쁨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상에 나쁜 에너지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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