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숨은영웅]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참전 자랑스럽다고 말 못 하지"

정빛나 2023. 7. 25.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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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참전용사 판데레일리…"살아남은 나는 그저 행운아일 뿐"
"영하 30도에도 공격 대비하려 침낭 연 채로 취침…우크라전과 달리 '육탄전'"
'정전협정 기념일'에 태어난 아들, 부친 일대기 기록한 책 발간 준비
'손가락 하트' 포즈 취하는 네덜란드 참전용사 (아른험[네덜란드]=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네덜란드 참전용사 헤르만 판데레일리(91) 씨가 지난 5월 중순 현지에서 열린 참전 기념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손가락 하트' 포즈를 한국사람들에게 배웠다고 했다. shine@yna.co.kr

(아른험[네덜란드]=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한국전쟁 참전한 게 자랑스럽냐고? 아니, 절대로 노(No)."

지난 5월 중순 현지에서 열린 한 행사장에서 처음 만난 네덜란드 참전용사 헤르만 판데레일리(91) 씨는 기자가 당황스러울 만큼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껏 취재 과정에서 만난 참전용사들과 사뭇 다른 답변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들으니 이내 끄덕여졌다.

"한국전쟁 때 아군은 물론이고 적군들도 그렇게나 많이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겠나. 절대 못 하지. 전쟁에서 승자란 있을 수가 없는 법이야."

그는 "살아남은 나는 정말 행운아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판데레일리 씨와 인터뷰는 행사장 현장을 시작으로 이후 최근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서면 등으로 진행됐다. 청력이 좋지 않은 관계로 아들 조니(39) 씨가 보조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 참전용사와 아들 (아른험[네덜란드]=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네덜란드 참전용사 헤르만 판데레일리(91·오른쪽) 씨와 아들 조니(39) 씨가 지난 5월 중순 현지에서 열린 참전 기념 행사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아들은 부친의 일대기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책을 집필 중이다. shine@yna.co.kr

1931년생인 판데레일리 씨는 사실 처음 한국전쟁에 자원한 건 다름 아닌 생계 때문이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네덜란드가 2차 대전을 겪은 이후 극심한 실업률 등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만 스무살이던 그 역시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지도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자원했다.

자원 뒤 수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은 그는 1951년 말 현지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3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맞닥뜨린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혹했다고 한다.

특히 연천을 비롯한 전방 일대에 투입됐을 당시 극한의 추위를 견디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판데레일리 씨는 "영하 30도를 웃도는 혹한에도 전방에서는 군용침낭 다 올리고 자는 게 엄격히 금지됐다"며 "그러지 않으면 갑자기 적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을 때 대응이 느려질 수밖에 없으니까"라고 떠올렸다.

강추위에 총을 계속 들고 방어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그는 "얼어 죽어 시커멓게 변한 손가락을 그냥 스스로 깨물어 베어버린 전우도 있었다"고 했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그래도 주로 탱크나 대포를 가지고 싸우지만,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육탄전이었다"고 힘줘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상황이 열악했다는 의미다.

판데레일리 씨는 유년기 시절 일찌감치 전쟁의 폐해를 경험한 당사자다.

해군 장교였던 부친 영향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살았을 때 일본 제국이 동인도를 침략하면서 판데레일리 씨 가족은 현지 일본인 포로수용소에서 3년 반을 지내야 했다.

군 복무 시절 네덜란드 참전용사 (암스테르담=연합뉴스) 네덜란드 참전용사 헤르만 판데레일리(91) 씨의 군 복무 시절 모습. photo@yna.co.kr [판데레일리씨 제공]

식민통치국 군인의 가족이나, 포로의 자녀로 지내는 것 모두 가족들에겐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 기간 그의 가족은 죽을 고비도 몇 번을 넘겼다.

한국전쟁 중에도 위험한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전방에 투입됐을 당시 적군의 계속된 포격 여파로 왼팔에 파편이 수십 개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그는 "동인도에서 나와 내 가족은 명백히 전쟁의 희생자들이었지만, 한국전에 자원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건 나의 선택이었다"며 참전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다.

한국에 있을 당시 전방 외에 거제도 포로수용소 등에도 투입됐다는 그는 1953년 네덜란드로 복귀한 뒤에도 군에 남았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2차 대전 영향으로 네덜란드군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고, 한국전 참전용사를 예우해주는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 탓인지 재방한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번번이 거절했다.

2017년 재방한한 네덜란드 참전용사와 아들 (암스테르담=연합뉴스) 네덜란드 참전용사 헤르만 판데레일리(91·왼쪽 두 번째)와 아들 조니(39)씨가 2017년 재방한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당시 사진. [판데레일리씨 제공]

그러다 60여년 만인 지난 2017년에야 참전용사 재방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아들의 지속적인 권유에 못 이겨서다.

조니 씨는 "아버지가 청년 시절을 보낸 한국, 그리고 발전한 한국을 꼭 다시 가보셨으면 했다"며 "나는 1984년생이지만 사실 생일이 정전협정 기념일(7월 27일)이다. 아버지는 어찌 보면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며 웃었다.

부친을 쏙 빼닮은 아들은 부친의 한국전쟁 참전 경험을 비롯한 일대기를 집필 중이다.

판데레일리 씨는 "한국이 발전한 것을 보고 사실 너무 깜짝 놀랐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정말 기뻤다"며 "한국인들의 엄청난 환대는 더 놀라웠다"고 떠올렸다. 그때의 좋았던 기억에 부자는 2019년에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는 "네덜란드에서는 한국전을 '잊힌 전쟁'이라고 부른다"며 "단 한 번도 그런 예우나 감사 인사를 받은 적이 없어서 더 감격스러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오는 10월이면 만 92세가 되는 노병은 "남은 생에 다시 한국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도 "다시 간다면 (내가 투입됐던) 연천의 아스널·에리고지 근처에 다시 가보고 싶고, (포로수용소가 있던) 거제도와 횡성에 있는 네덜란드참전기념비도 꼭 가보고 싶다"며 웃었다.

2019년 재방한한 네덜란드 참전용사 (암스테르담=연합뉴스) 네덜란드 참전용사 헤르만 판데레일리(91·왼쪽 두 번째)가 2019년 방한했을 당시 사진. [판데레일리씨 제공]

shi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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