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사는 왜 책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 이색 직업 출신 편집자들
책의 뒤에는 언제나 '편집자'가 존재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책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속하나,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책의 내용과 방향을 정하고 원고를 다듬는 일련의 작업은 편집자의 손에 달렸다. 전공 제한은 없지만 출판 편집자는 인문사회 분야 전공자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최근 색다른 학문을 전공한 이가 책의 매력에 빠져 전업 편집자의 길을 걷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출판계의 저변이 다양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다.
① 그 의사는 왜 '안 팔리는 책'을 만들까
소아과 전문의 생활 8년 반을 포함해 의사로 13년 반을 살았다. 어느 날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의사 생활을 중단하고 정신질환 등에 관한 서적의 원서를 구해 마구잡이로 읽었다. '왜 이렇게 좋은 책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지?', '같은 고통을 안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이 갈증을 해소하는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자신이 직접 의학 관련 해외 양서를 펴내고자 2013년 출판사 '꿈꿀자유'를 세웠다.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며 책을 만들고 있는 강병철(56) 꿈꿀자유 대표 이야기다.
2015년 메르스 사태는 출판의 역할을 고민하게 된 계기다. 미국에서 출간된 인수공통 전염병 책을 발견했으나 돈이 없었다. 눈물 어린 전자메일을 보내 '판권 에누리'에 성공했다. 2017년 한국에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책은 2, 3년 동안 전혀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2020년 초, 또 다른 인수공통 전염병인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자 분위기는 반전됐다. 책은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라 지난해 '1만 부 기념 개정판'을 찍었다.
강 대표는 '잘 팔리는 책'을 만들어 다른 출판사와 경쟁할 마음이 없다. 수요는 적더라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특정 주제에 천착하겠다는 생각이다. 정신질환이나 장애, 희귀병 같은 주제다. "의학을 배운 데다 글을 쓰고 번역하며 고치는 사람으로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우리나라에 공급하고 싶다는 게 출판을 시작한 궁극적인 목표였어요." 의사 가운을 벗은 그는, 이제 책으로 사람을 살리려 한다.
② 의치약·생명공학 출판 브랜드 이끄는 간호사 출신 편집자
간호학을 석사과정까지 공부한 김선형(38) 동아시아 편집팀장은 5년 차 편집자다. 임상간호사로 10년 이상 일했다. 그가 처음 일했던 병동은 산부인과 병동. 난임과 시험관 시술 등으로 고통받는 여성들과 여성의 출산을 둘러싼 다양한 장면을 지켜봤다. 그가 올 초 피임의 선구자인 마거릿 생어의 책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하게 된 배경이다.
동아시아는 다음 달 의치약·생명공학 브랜드인 '히포크라테스'를 론칭한다. 그에 맞춰 한창 김 팀장이 마감 중인 히포크라테스의 첫 책은 '생물학적 풍요'. 동물의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 섹슈얼리티를 총망라한 생명과학 연구다. 1,400페이지 분량의 책은 190여 종 동물의 성적 다양성을 다루는데 2003년 미국의 소도미법(동성애 성교 처벌법) 폐지 판결과 2018년 인도 대법원의 동성애 비범죄화 판결에서 이 책이 인용되기도 했다.
"사법고시를 폐지하고 로스쿨을 도입한 것도 다양한 전공자가 법조계로 들어와 지평을 넓히기 위한 목적이 있었죠. 단순히 언어와 문장이 아닌 저자와 학문적 소통을 할 수 있는 역량이 편집자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출판계에도 다양한 학문적 지식과 배경을 가진 이들이 와서 풍성한 담론 생성에 이바지하길 바라요."
③ 과학관에서 별자리를 설명하던 천문학도가 '과학 편집자'로
대학에서 천문우주학을 전공한 김효원(32) 사이언스북스 편집자는 이제 막 만 2년을 채운 새내기 편집자다. 사회 경력은 짧지 않다. 과천국립과학관에서 3년 동안 대중을 대상으로 과학 지식을 설명했고, 이후에는 과학 매체에서 기자로 일했다. 전문가를 직접 만나 취재를 해보면서, 다른 이가 연구한 것을 쉽고 재밌게 풀어서 설명하는 책을 기획하는 일에 매료됐다. 진로를 바꿔 편집자로서 처음 세상에 선보인 책 '최준석의 과학 열전'은 그에게 가장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국내 과학계를 대표하는 물리학자와 천문학자 62명을 만나 인터뷰하고 취재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화제예요. 해외에는 관련 책이 나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이죠. 아무래도 천문학 전공이다 보니 그런 주제에 관심이 가요. 다양한 분야, 고유한 전문성이 있는 편집자들이 책의 세계로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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