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막겠다던 보증보험 강화… 되레 ‘전세 별따기’ 됐다

정순우 기자 2023. 7. 2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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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집주인 덮친 ‘정책의 배신’

서울 동대문구에서 전셋집을 알아보던 직장인 박모(29)씨는 마음에 드는 원룸을 발견하고 공인중개사에게 문의했다가 “보증보험 가입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올해 5월부터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보증기관의 전세 보증 가입 요건이 까다로워져, 집주인이 제시한 전셋값보다 1500만원 낮춰야 가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전에 공시가격의 1.5배까지 가능하던 전세 보증 한도를 지난 5월부터 1.26배로 낮췄다. 박씨는 집주인에게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하도록 전셋값을 낮춰달라고 요구했지만, 집주인은 “나가는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깎아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박씨는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고도 전세 계약을 할 수 있지만, 보증금을 떼일까 불안해서 결국 계약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이 전세 사기에 악용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가입 요건을 강화하면서 세입자들 사이에선 “전셋집 구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아파트보다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잦은 빌라·오피스텔을 주로 찾는 2030세대에서 이런 불만이 커지고 있다. 전세 사기와 역전세(전셋값이 하락해 보증금을 제때 못 돌려받는 것) 우려가 커지면서 세입자들 사이에선 보증보험이 필수가 됐지만 전세 매물 가운데 보증금이 가입 요건보다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보증금을 낮추려 해도 “기존 세입자에게 돌려줄 돈이 없다”며 거부하는 집주인이 많다. 세입자들은 불안함을 안고 보증보험 가입 없이 계약을 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비용 지출이 큰 반전세 또는 월세를 선택하고 있다.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이 도리어 세입자들을 궁지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송윤혜

◇높아진 ‘보증보험 문턱’에 헉헉대는 2030

국토교통부는 지난 5월부터 전세 보증보험 가입 요건을 ‘공시가격의 1.5배’에서 ‘공시가격의 1.26배’로 낮췄다. 보증보험을 믿고 높은 전셋값에 계약하는 세입자들을 이용해, 자기 돈 한 푼 없이 전세 보증금으로 빌라를 사들인 후 사라지는 ‘무자본 갭투자 사기’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결국 공시가격 2억원짜리 전셋집의 보증 한도가 3억원에서 2억5200만원으로 4800만원(16%) 낮아졌다. 올해 전국 공동주택(아파트·연립·다세대) 공시가격이 18% 하락한 것까지 감안하면, 보증 한도 축소 폭은 더욱 크다.

전셋집을 구하지 못한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낮추는 대신 월세를 내고 있다. 직장인 김모(34)씨는 서울 화곡동에서 전세 2억원짜리 빌라를 구했다. 하지만 전세 보증 한도는 1억7000만원이었다. 김씨는 결국 보증금 차액 3000만원을 월세로 돌려 ‘보증금 1억7000만원, 월세 15만원’ 조건에 계약했다.

세입자뿐 아니라 집주인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서울 성동구의 전용면적 29㎡ 규모 빌라를 전세로 내놓은 정모(56)씨는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기존 세입자는 보증금 3억7000만원에 입주해 있다. 하지만 이번에 공시가격이 내린 데다, 보증 한도까지 강화되면서 보증 한도는 약 2억9000만원까지 내렸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 대부분은 “보험 가입이 가능한 2억9000만원까지 보증금을 내리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겠다”며 돌아섰다. 정씨는 “8000만원을 대출받아 세입자를 내보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갈수록 혼란 더 커질 듯

시장 혼란은 더 커질 전망이다. 정부가 올해까지는 신규 전세 계약에만 강화된 규정을 적용했지만, 내년 1월부터는 기존 계약 갱신이나 재계약 때에도 보증 한도가 줄어든다. 또 정부는 임대사업자가 가입하는 ‘임대보증금 반환 보증보험’의 가입 요건도 일반 전셋집과 똑같이 ‘공시가의 1.5배’에서 ‘공시가의 1.26배’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임대사업자는 보증보험 가입이 의무이므로, 주택 여러 채를 임대하는 사업자는 제도가 바뀌면서 단기간에 큰돈을 마련해야 할 처지가 된다. 보증보험 가입 의무를 어기면 임대사업자에게 최대 3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되고,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세입자는 보증금을 떼일 수도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전문가들은 보증보험 요건 강화의 취지는 좋지만, 갑자기 일률적으로 시행한 탓에 선량한 세입자와 집주인이 모두 피해를 보는 부작용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임대 주택 수나 보증금 등에서 전세 사기와 관련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집주인에 한해서라도 가입 요건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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