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셋 어머니도 매일 시 필사…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어요”

이호재 기자 2023. 7. 2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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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건 '자각'하는 과정이에요. 반복되는 삶에서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죠."

정 교수가 좋은 시를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2000년 그가 미국 뉴욕주립대(버펄로) 현대미국시 박사 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을 떠날 때 어머니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수필가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1952∼2009)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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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교수, 에세이 2편 연달아 출간
여성 시인 작품들 쉽고 친절하게 소개… “인생 담긴 시 읽는 건 ‘자각’하는 과정
시 소개하는 일, 논문 쓰기만큼 즐거워… 원문 표현 최대한 살려 번역하려 애써”
서울 종로구 청계천에서 21일 미소짓는 정은귀 한국외국어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정 교수는 “시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시는 재밌다. 또 시는 정말로 힘이 된다”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시를 읽는 건 ‘자각’하는 과정이에요. 반복되는 삶에서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죠.”

정은귀 한국외국어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54)는 시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문학소녀처럼 보였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21일 만난 정 교수는 “논문 쓰는 일만큼 시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글을 쓰는 일이 즐겁다”며 웃었다.

정 교수는 미국의 앤 섹스턴(1928∼1974), 영국의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 등 해외 여성 시인의 시를 국내에 소개한 문학 번역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미국 시인 어맨다 고먼(25)의 시집 ‘우리가 오르는 언덕’(은행나무·2021년),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은행나무·2022년)도 그가 번역했다. 정 교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많은 여성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눈을 떴다”며 “한국 독자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영미 시인의 작품을 원한다는 걸 알아 번역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고 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
정 교수는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 최근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민음사)과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마음산책)이란 에세이 2편을 연달아 펴냈다. 신간에서 그는 여성 시인의 작품을 쉽고 친절하게 소개한다.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80)의 문장 “나는 말을 해요,/산산이 부서졌으니까요’(시 ‘꽃양귀비’ 중)를 소개하며 “말을 건네는 것은 부서진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평화란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 내는 것”(나희덕 시 ‘평화의 걸음걸이’ 중)이란 시구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외치고 나누는 평화가 얼마나 어설픈 일이었는지 실감한다”고 고백한다.

번역할 때는 원문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애쓴다. 위에 소개한 글릭의 시 원문은 “I speak/because I am shattered.” 정 교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꽃의 마음이 담긴 원문의 표현을 오랜 고민 끝에 우리말로 옮겼다”고 했다.

정 교수가 좋은 시를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2000년 그가 미국 뉴욕주립대(버펄로) 현대미국시 박사 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을 떠날 때 어머니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수필가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1952∼2009)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정 교수는 “23년 전 어머니의 말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며 “83세인 어머니는 지금도 시를 매일 필사한다. 가끔 자신이 쓰신 시를 내게 보내오기도 한다”고 했다.

신간 ‘다시 시작하는…’에 2021년 서울시 시민대학에서 시민 여러 명이 함께 쓴 시 ‘엄마 이야기’를 소개한 것도 눈길이 간다. “엄마는 안전지대다/엄마는 선물이기도 아니기도 하다/엄마는 ‘하기 나름’이다/엄마는 핸폰이다”라는 시구에는 엄마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평범한 이들의 시각이 다양하게 담겼다. 정 교수는 “시를 쓰고 나누는 과정에서 모두가 자기만의 엄마를 새롭게 만났다”며 “시를 만나는 일은 소중하지만 잊고 있던 존재들을 다시 품고 응시하는 일”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어머니가 쓴 시 ‘첫사랑’을 보여줬다. 정 교수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를 첫사랑으로 묘사했다. “삶에 짜들고 힘겨웠을 때/어머니는 나에게서 떠나가셨다”(시 ‘첫사랑’ 중)

“한 편의 짧은 시에 인생이 들어 있어요. 하나의 시어, 한마디 구절을 읽을 때마다 경이로운 이유죠. 제 어머니처럼 누구나 시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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