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부러뜨려서라도 돌아가고 싶어”…눈물로 쓴 러 전사자의 일기

자포리자서 숨진 31세 예비군…“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다”

지난 2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 조성된 대규모 러시아 전사자들의 묘지에서 한 여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AP 뉴시스

“나는 그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다. 우리도 그들을 죽이지 않고 그들도 우리를 죽이지 않길 바란다.”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동원령 발령으로 최전선에 투입됐다가 전사한 러시아 군인이 유품으로 남긴 일기가 공개됐다.

22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더타임스 일요판 선데이타임스에 따르면 이 일기를 작성한 주인공은 모스크바에 살던 건설 노동자 비탈리 탁타쇼프(31)였다. 2018년 결혼해 두 살짜리 아들을 둔 탁타쇼프는 불과 약 1년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직장에 다니며 휴가 때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지난 1월 동원된 러시아 예비군들이 옴스크에서 전장으로 향하고 있다. 로이터 뉴시스

그러나 예비군이던 그는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州) 토크마크 전선에 투입됐다. 당시 탁타쇼프처럼 동원된 러시아인은 30만여 명에 달했다. 탁타쇼프는 이때부터 올해 1월 초까지 공책에 가족에게 보낼 편지를 쓰며 전쟁터에서의 삶을 일기 형식으로 33쪽에 걸쳐 기록했다.

징집 첫날이었던 11월 29일 자 일기에서 그는 “우리는 (체첸군) 근처에 머물고 있는데 밤에도 총소리가 들린다. 드론이 날아다니고 대포가 작동하는 걸 목격했다”면서 “(가족) 모두 너무 보고 싶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썼다. 다음날인 30일 자 일기에는 자기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두렵다. 눈물을 흘리면서 이 글을 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족) 모두를 정말 사랑한다”고 썼다. 그는 이어 “나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다. 모든 종교가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도 살인하지 않고 그들(우크라이나군)도 우리를 죽이지 않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전투를 하고 있다. AP 뉴시스

12월 4일 자 일기에서 탁타쇼프는 자기가 최전선에 끌려가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자포리자 지역 내 최전선에서 싸우던 제70연대에 소속돼 있었다. 탁타쇼프는 아내를 향해 “정말 사랑한다. 당신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 부디 나를 기다려달라”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전쟁 장기화로 새해 휴가마저 취소되자 그는 절망감을 적었다. 그는 “주변 사람이나 나 자신을 총으로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오늘은 나무를 자르던 중 발목을 부러뜨려서라도 당신들(가족) 곁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다.

탁타쇼프는 1월 5일 자를 마지막으로 이 같은 일기 쓰기를 멈췄다고 더타임스는 전했다. 그가 기록을 중단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지난해 9월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접경지대에서 전사자들의 시신을 운반하고 있다. AP 뉴시스

이후에도 계속해서 최전선에서 싸웠던 그의 시신은 자포리자 지역 남동부 평원으로 진격한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발견됐다. 우크라이나군이 탁타쇼프의 군복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일기장을 발견했다. 우크라이나군은 그의 시신을 땅에 묻어준 뒤 이 일기장을 선데이타임스에 넘겼다. 선데이타임스는 “우리가 찾은 건 푸틴의 전쟁으로 미래가 파괴된 한 가정의 모습”이라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크렘린궁의 거짓말 뒤에 숨은 잔인한 현실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박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