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서 일상의 희로애락으로 내려온 화가의 시선[미술을 읽다]

김영나 서울대명예교수·전국립중앙박물관장 2023. 7. 24.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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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넬로 다메시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1475년경).
김영나 서울대명예교수·전국립중앙박물관장
한 인물이 고딕 양식의 실내에 마련된 작은 입방체 같은 공간에서 독서에 몰두하고 있다. 화면 맨 앞 단에 공작새와 자고새가, 그 뒤에는 책상과 서가, 오른쪽의 어두운 열주 속에는 사자가 있지만 여러 개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광선은 관람자의 시선을 중앙의 인물로 향하게 한다. 이 인물이 바로 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사제 성 히에로니무스다. 모든 사물과 공간은 원근법에 의해 명확하게 설정되었고,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성 히에로니무스를 주제로 하는 종교화이지만 이 그림은 마치 학자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일상의 모습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1475년경 시칠리아 출신의 화가 안토넬로 다메시나가 그린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는 종교화가 인간의 세계와 혼합돼 나타나는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준다. 기독교는 아직도 모든 분야의 중심이었지만 휴머니즘의 도래와 함께 종교화는 세속의 장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흥미로운 작품은 르네상스에서 근대까지,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변화하는 서양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거장의 시선’에서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인 카라바조의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카라바조는 이상화된 인간보다 슬픔, 아픔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세속적인 인간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빛의 강한 대조를 통해 인간의 극적인 심리를 표현하는 그의 그림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전시는 이어 카라바조의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작품으로 인도한다. 종교화에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카라바조는 이상화된 인간보다 다양한 인간의 감정, 슬픔, 죽음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사실의 관찰을 강조했다. 인체는 아직도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그의 종교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손발이 더럽거나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평범한 서민으로 나타난다. 카라바조는 인물을 어두움과 밝음의 강한 대조 속에 드러나게 하면서 극적인 순간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그 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당시 중요한 미술의 종류로 여기지 않았던 일상생활의 장면이나 정물화도 그렸는데 그중 하나가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이다. 이 그림에는 어두운 방 안에 신비스럽게 광선이 비치는데, 한 소년이 꽃병의 장미 쪽으로 손을 뻗다가 도마뱀에게 물려 깜짝 놀라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작품의 의미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쾌락을 상징하는 과일들이 놓여 있고, 한쪽 어깨를 노출하고 머리에 장미꽃을 꽂은 이 소년의 얼굴에 드러난 아픔에 관심을 가지고 묘사했던 것은 양성애자였던 카라바조의 비밀스러운 내면의 표현일 수도, 사랑의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발그레한 뺨과 부드러운 얼굴의 미소년들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과일 바구니를 안고 있는 다른 몇 점의 작품도 그의 성적 정체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크 시대로 불리는 17세기에는 스페인, 프랑스, 플랑드르에 새로운 문화 중심지가 형성되면서 시각미술은 강력한 권력과 부를 축적한 절대주의 왕과 귀족들을 영광스럽게 만들어주는 매체가 되었다. 이와는 다르게 중산층의 수집가들을 상대로 독자적인 미술을 발전시킨 곳이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이번 박물관 전시에서는 젊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말년에 파산하고 시련을 겪었던 렘브란트가 죽기 몇 달 전에 그린 자화상을 주목해야 한다. 걱정과 근심으로 지쳐 있으면서 우리를 조용히 건너다보는 그의 자화상은 마치 자신의 영혼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유럽은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기폭제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대혁명은 권력의 이동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제도와 관습을 무너뜨렸다. 또 다른 변화는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산업혁명의 혜택으로 유럽인들이 누렸던 물질적인 풍요로움이었다. 미술가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사회의 감각과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다. 이들은 신화, 종교화, 문학과 같은 주제에서 벗어나 자신이 직접 보거나 경험한 멋있는 근대적 삶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두아르 마네 ‘카페 콩세르의 한 구석’ (1878∼1880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마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당시 다른 어느 세대보다 여유로운 삶을 즐기던 파리의 부르주아 시민들이 해변이나 공원을 산책하거나 도시의 카페에서 담소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화가들은 대도시로 탈바꿈한 파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도시적 경험의 근대성을 표현하려 했다. 마네의 ‘카페 콩세르의 한 구석’에서 무대에서 춤을 추는 무희, 구경하는 관객들, 또 맥주잔을 나르는 웨이트리스는 모두 한순간의 동작이 포착되었다. 마치 우연히 스냅 사진에 찍힌 것처럼 어수선해 보이는 이 장면에서 이들은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 마네는 공연도 보고 식사와 담소를 즐길 수 있는 파리의 새로운 명소인 카페 콩세르에서 순간의 시각과 손님들의 떠들썩한 소리와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빠르게 붓을 놀려 채색하였다.

‘거장의 시선’ 전시는 여기까지다. 20세기의 미술에서는 인물이 거의 사라지고 추상미술이 대세가 되었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같은 화가는 지나치게 물질적이 된 서구문화 전반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들이 추구하던 유토피아를 선, 형태, 색채의 무한한 형식주의와 내용으로 구현하면서 모더니즘 미술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극도의 심미적 표현으로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는 불평을 듣게 한 모더니즘 미술은 196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로 대체되면서 미술가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인간의 경험을 새롭게 표현하기 시작한다. 신의 세계는 사라졌지만 인간의 세계는 아직도 끝없는 탐구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김영나 서울대명예교수·전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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