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타냐후 ‘사법 장악案’ 통과… 이스라엘 건국 이래 최악 분열
전국 수십만명 반대 시위
이스라엘의 사법부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이른바 ‘사법 장악안’이 24일(현지 시각) 의회 표결을 거쳐 결국 법제화됐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이스라엘 우파 연합이 밀어붙여온 법안은 행정부에 대한 사법부의 견제 기능을 크게 줄인다는 내용을 담아, 많은 국민들이 격렬한 반발 시위를 벌여왔다. 법안 통과 후에도 야당과 시민 사회, 전·현직 국가 지도자와 군인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있어 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 이래 최악의 분열로 치닫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쟁 등 외부 요인이 아닌 내부 갈등으로 이스라엘이 국가적 마비에 빠진 전례는 없다. 혼란이 지속될 경우 국가 신용도가 하락하고 안보 위험이 커지면서 총체적 난국 상황으로 접어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는 이날 ‘사법부에 관한 기본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치고 찬성 64표, 반대 0표로 최종 통과시켰다. 우파 연정은 현재 크네세트 전체 120석 중 과반인 64석을 확보하고 있다. 전날(23일)부터 진행된 법안 토론회에서 24시간 넘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의사 진행 방해)를 감행하며 막판까지 합의를 시도한 야당 의원들은 네타냐후 측이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표결을 보이콧하고 퇴장했다. 법안은 과반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우파 연합은 이 법안을 ‘사법 개혁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날 통과된 법안의 핵심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줄이겠다는 것이다. 사법부가 행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면 직권으로 폐지시킬 수 있는 기존 권한을 없앤다는 내용이 담겼다. 우파 연정은 이번 법제화를 시작으로 향후 추가 입법을 통해 사법부의 권한을 더 줄이겠다는 방침이다. 예를 들어 대법원이 내린 결정을 크네세트가 표결로 뒤집을 수 있도록 하고, 법관 임명 위원회 내 크네세트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네타냐후 연정이 사법부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한 광범위한 노력의 첫 단계를 완료했다”고 보도했다.
행정부를 견제하며 국가에 ‘견제와 균형’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는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줄인다는 이 방안이 지난 1월 발표된 후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 왔다. “정권이 사법부를 파괴하려 한다”며 반대 시위는 확산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우려를 표하는 등 논란이 커지자, 우파 연정은 지난 3월 예정된 표결을 일단 연기했다가 넉 달 뒤 강행했다. 사법 장악 강행에 대해 네타냐후 연정은 “선출 권력인 행정부 권한을 사법부가 과도하게 간섭해온 폐해를 없애야 한다. 사법부 권한이 너무 비대하다”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부 측의 주장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시위는 법제화가 가시화되면서 더욱 격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네타냐후 연정의 사법 장악안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표결이 진행되기 전날이었던 23일부터 예루살렘·텔아비브 등 주요 도심에 나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민주주의를 지키자”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표결을 전후해 이스라엘 전국에서 거리 시위에 나선 국민만 최소 25만명이며, 이는 올 초 네타냐후 연정의 사법 장악안이 발표된 뒤 29주째 이어진 시위라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은 전했다.
이달 들어선 전투기 조종사, 특전사, 드론 운용인력 등 예비역 4000여 명이 네타냐후의 사법 장악 시도에 항의하며 복무 거부를 선언했다. 일부 고위 장교들이 반발해 전역을 준비한다는 외신 보도까지 나왔다. 국민 80만명이 가입한 이스라엘 최대 노조 노동자총연맹(히스타드루트)은 곧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아랍권과 상시 대치 중인 엄중한 안보 환경에 똘똘 뭉치며 치안을 유지해온 이스라엘선 볼 수 없던 광경이다.
글로벌 사회는 이 같은 이스라엘의 혼란이 안보·경제 위기로 이어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NYT는 “예비군이 이스라엘군 전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이탈로 안보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앞서 국제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지난 4월 사법 장악을 둘러싼 혼란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안정적’으로 내렸다.
네타냐후는 표결 이틀 전인 22일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인공 심장박동기 이식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내 몸 상태는 건강하며 사법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영상 메시지를 남길 정도로 강행의 뜻을 피력했던 그는 23일 입원 약 30시간 만에 퇴원해 의지를 보였다. 2009년부터 2021년까지 12년간 집권하고 반(反)네타냐후 연정에 권력을 넘겨줬다가 1년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그가 정치적 승부수를 사법 장악에 던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스라엘 주류 정치권의 이념 갈등이 터져 나왔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소리(VOA)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우 성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 정부는 좌파 성향 지식인들이 선출 절차 없이 이스라엘 사법부에 포진해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호주 사업가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네타냐후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사법 개혁’을 들고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삼권분립 기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 권력을 제어하거나 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은 다른 국가에서도 일고 있다. 미국 연방 상원에선 민주당 주도로 대법관 재산 공개 등을 골자로 하는 대법관 윤리 강령 법안이 추진되는 중이다. 잇단 보수적 판결로 민주당인 바이든 정권의 정책에 제동을 건 연방대법원을 견제하려는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폴란드도 2019년 정권에 비판적인 판사를 징계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유럽연합 최고법원 유럽사법재판소(ECJ)는 이에 “EU 법을 위반했다”고 지난달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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