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아 칼럼] 박근혜 ‘유체이탈’ + MB식 ‘이벤트’ = 윤석열 국정
열흘 전(7월 15일)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가 침수돼 시민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순방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 이틀 후 귀국했지만 오송에 가지 않았다. 경북 예천(17일), 충남 공주(18일)만 찾았다. 19일엔 부산에 기항한 미국 전략핵잠수함(SSBN) 켄터키함에 올랐다. 20~21일은 대통령실에 머물며 통상적 일정만 소화했다. 주말(22~23일)엔 쉬었다.
지도자의 메시지는 ‘발화’와 ‘동선’을 통해 전달된다. 무엇을 말하는지, 어디 가는지가 관심사와 지향점을 드러낸다. 미국 외 어느 나라 정상도 승선한 적 없는 SSBN에 탈 시간과 에너지가 있었다면, 오송에 갔어야 옳다. 오송 피해자와 유족을 위로하는 일이 “북한 정권 종말”을 경고하는 일보다 사소한가. 윤 대통령은 ‘오송’이나 ‘궁평’이란 명칭조차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윤 대통령의 ‘오송 포비아’ 배경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인재(人災)’ 성격이 뚜렷한 만큼, 책임론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일 터다. 윤 대통령은 귀국 후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과 피해를 입은 분들께 ‘위로’를 드린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책임’ ‘죄송’ ‘송구’는 없었다. 지난해 8월 물난리 때는 그나마 “정부를 대표해서 죄송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과에 더 인색해진다. 대통령은 무엇이 두려워 책임 회피에 이토록 진심인가.
“물관리 업무를 제대로 하라.” 윤 대통령이 최근 한화진 환경부 장관을 질타했다. 한 장관은 “명심하겠다”고 했다. 책임져야 할 대통령이 책임을 떠넘겼다. 기시감(旣視感)이 든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대통령 박근혜가 삼성서울병원장을 불렀다. “확산이 꺾이려면 환자의 반이 나오는 삼성서울병원이 어떻게 안정되느냐가 관건이다.” 병원장은 “너무 죄송하다”며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사과해야 할 대통령이 사과받았다. 박근혜는 메르스 사태 초기 이런 발언도 했다. “여러 문제점에 대해, 어떻게 확실하게 대처 방안을 마련할지 정부가 밝혀야 한다.” 지난 17일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윤 대통령이 출국 전, 사전 대비를 철저히 하고 저지대 주민을 대피시키라는 지침을 내렸다. 정부가 그 지침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점검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다. 정부와 분리된 초월적 존재일 수 없다. 윤 대통령 집무실에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새겨진 명패가 놓여 있다. ‘유체이탈’식 통치를 이어가려면 이 명패는 책상에서 치우기 바란다. 책임은 선택적으로 질 수 없다.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윤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生則死) 사즉생(死則生)”을 인용하며 연대를 강조했다. 바로 그 시간 오송과 예천에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당장 ‘생즉사 사즉생’ 정신으로 시민을 살려내야 할 곳은 우크라이나가 아니었다.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후, 당시 대통령 이명박은 건군 이후 최초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를 주재했다. 대국민 담화는 청와대가 아니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했다. 임기 말에는 돌연 독도를 방문했다. 두달 전까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추진하다 태도를 바꿔 논란이 됐다. 신중한 고려가 필요한 외교안보 현안에서 ‘이벤트’와 ‘퍼포먼스’로 성과를 내보려는 전·현직 대통령의 모습이 닮았다. 윤석열 정부가 MB정부와 ‘복붙(복사 후 붙여넣기)’ 수준이니 딱히 놀랄 일도 아니다. 외교안보정책을 주도하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MB 청와대의 대외전략기획관을 지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 후보자도 MB 청와대 통일비서관 출신이다. 김대기 비서실장,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사실상 내정된 이동관 대외협력특보 등 MB맨을 모두 나열하기엔 지면이 비좁다. 무엇보다 MB와 윤 대통령의 공통분모는 ‘내가 (사장을·수사를) 해봐서 아는데’일 터다. 하지만 그 시대는 지났다. ‘해봐서 안다’고 말했다간 꼰대 소리 들을 뿐이다.
“경험 없이 정치에 뛰어들어 10개월 만에 대권을 거머쥐었다”(지난 6일 청년정책점검회의). 스스로 인정한 대로, 윤 대통령은 ‘어쩌다’ 대통령이 됐다. 주권자의 선택을 받았으니 무경험 자체를 탓할 순 없다. 취임 이후 부단히 학습하고, 전문가 조언을 경청하고, 시민·야당·언론과 소통하면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학습·경청·소통 대신 실패한 전직 대통령들을 ‘레퍼런스’로 삼은 것 같다. 굳이 MB·박근혜를 본받아야겠다면 배울 점을 알려드리겠다. MB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때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아침이슬>을 들었다. 박근혜는 메르스 사태 당시 예정돼 있던 미국 방문을 미뤘다. ‘듣는 척’은 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켄터키함을 타러 가며, 리투아니아 명품 쇼핑 논란에 휩싸인 김건희 여사를 동반했다. 김 여사는 핵잠수함이 아니라 수해 현장에 갔어야 한다. 김 여사의 켄터키함 승선은 국민이 실망하든 분노하든 ‘듣는 척’도 않겠다는 대통령 부부의 선언이다. 대선 후보 시절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권을 향해 일갈했다.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어요”. 윤 대통령 임기는? 3년 9개월여 남았다.
김민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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