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진료비도 못믿겠다”…부자나라 자부심 커졌지만 신뢰는 쪽박
전통시장서 무게 속이고
한방 치료는 부르는 게 값
전문가 “저신뢰 사회 현상”
지난 21일 밤 인천 소래포구. 킹크랩과 대게를 구입하는데 곳곳에서 어패류가 아니라 바구니 무게까지 포함해 가격을 높게 산정한다. “바구니 무게는 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항의하자 “살아 있는 킹크랩이라 무게가 자꾸 변한다”고 동문서답이 돌아왔다.
40대 회사원 진 모씨는 얼마전 서울 영등포 인근 노래방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1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고 나온 뒤 청구된 가격이 무려 9만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고급 노래방도 아닌데다가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진 씨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항의하자, 주인은 “코로나로 영업을 못해서 너무 힘들었다. 웬만하면 양해하고 계산해 달라”고 읍소했다.
전국 각지에서 가격을 부풀리는 ‘바가지’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전통시장, 지역축제, 명동 등 관광객이 몰리는 장소는 물론이고, 한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영역에서 ‘내일은 없다’ 식의 바가지 영업이 판을 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상인 개개인의 욕망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불신 사회’의 한 단면으로 봐야한다고 분석한다. 사회적 신뢰가 붕괴하면서 서로 속고 속이는 양태의 범죄나 일탈행위가 많아졌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상도의가 무너져버렸단 얘기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 공동체 구성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며 “한국의 사회적 신뢰가 낮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가지의 사전적 의미는 턱없이 높은 가격에 물건을 사게돼 속는 것이다. 전세사기·주가조작·보이스피싱처럼 최근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각종 사기성 범죄들도 넓게 보자면 바가지의 ‘범죄 버전’에 속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구성원 간 신뢰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같은 ‘신뢰파괴 범죄’는 증가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전세사기 검거 건수는 지난 16일 누적 기준 862건이었다. 2022년(387건) 한해 동안 검거 건수를 이미 두배 이상 넘어선 것이다. 2021년 187건과 비교하면 4배를 뛰어 넘는 수치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사기 범죄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범죄”라면서 “구성원들이 사회를 신뢰하지 않는 ‘불신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저신뢰 사회는 수치로도 증명된다. 영국싱크탱크 레가툼이 경제·사회적자본 등을 토대로 발표하는 ‘2023 레가툼 번영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지수는 세계 107위였다. 종합 순위는 29위.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신뢰·유대감과 같은 공동체 지수는 낙제 중 낙제라는 의미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안팎의 선진국에 도달한 대한민국이지만 사회적 신뢰는 이에 못미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원칙과 법치의 확립이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치인들의 비리 행위가 끊이지 않는데, 그에 대한 처벌이나 수사는 지지부진한 경우가 많다. 잘못된 본보기는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 파괴 행위를 부추기고, 낮은 양형 기준이나 솜방망이 처벌로 사기나 주가조작, 바가지 등이 더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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