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잇는 급발진 책임 논란 끝날까] 급발진 의심 사고 책임 법적 틀 논의…제조사 입증책임 커지나
2013년부터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과 관련해 소비자를 더 우선하기 시작했던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급발진이 의심되더라도 소비자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1심에서 자동차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이 의심된다는 판결이 나왔더라도 항소심과 대법원을 거치면, 전면 뒤집히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그 변화가 감지된다. 그간 수십차례 있었던 급발진 의심 사고 경험이 쌓이면서, 급발진 판단의 근거인 사고기록장치(EDR)의 신뢰성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고, 국회에서는 ‘급가속’으로 발생한 모든 교통사고에 대해 자동차 제조사가 결함이 없다는 걸 입증하도록 하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첫 논의도 시작됐다.
최근 하급심 법원에서 급발진으로 인한 차량 결함이 의심된다는 판단이 나오면서 급발진에 대한 입증책임을 판단하는 사법부의 기준과 입증책임을 제조사에 부과하는 입법부의 논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제조사의 결함 입증, 상대적으로 쉬운 미국
2013년 10월 24일(현지시각) 미국 오클라호마주(州) 1심 법원에서 배심원단은 2007년 도요타 차량 급발진 사고로 숨진 피해자와 유족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에게 300만달러(약 38억9800만원)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이 소송은 도요타 세단 ‘캠리’ 차량이 고속도로 출구에서 급발진하며 장벽에 충돌해 운전자가 중상을 입고 동승자가 사망한 사건에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도요타를 상대로 한 400여 건의 급발진 소송이 제기됐고, 해당 평결이 나오면서 도요타는 1200만 대 차량 리콜과 소송 합의금 및 벌금 등으로 총 40억달러(약 5조1980억원)에 달하는 큰 비용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조물 책임법(PL·Product Liability)의 존재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볼 경우 제조사가 직접 배상 책임을 지도록 한다. 특히 입증책임 전환(shifting the burden of proof)을 인정하고 있다. 입증책임 전환은 (소송을 건 측이 피소송자의 잘못에 대한 근거를 입증해야 하는) 소송법의 일반원칙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소송을 건 사람이 아닌 상대방이 이를 입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韓 제조물 책임법…민사 1건도 인정 안 돼
제조물 책임법은 국내에도 있지만, 미국과는 결이 다르다. 급발진이 의심되더라도 차량 결함 등이 인정되지 않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소비자가 제조사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려면 제품의 결함을 직접 입증해야만 한다. 고도의 기술력과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고, 제조사가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품 결함을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법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조물 책임법이 존재하지 않던 2000년대 이전까지는 물론, “제조업체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사람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명시한 제조물 책임법이 2002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1999년 대우자동차 운전자 42명이 급발진을 이유로 회사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는데, 2002년 1심 재판부는 차량 변속기에 시프트록(Shift Lock·브레이크 페달을 밟아야만 변속레버를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 장착돼 있지 않아 차량에 결함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결국 2·3심에서 뒤집혔다. 당시 대법원은 “급발진 사고를 대비한 안전장치가 없다고 해서 그 자동차가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안전성을 결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국내 제조물 책임법에 따라 운전자 본인의 과실이 없었다는 사실과 차량 결함을 소비자가 직접 입증해야만 했는데, 대법원은 이 점이 제대로 입증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대법원판결은 지금도 여전히 민사 사건의 중요 판례로 인용되고 있다.
EDR 신뢰하는 한국…학계선 “신뢰성 없다”
급발진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으로 EDR이 꼽힌다. EDR은 완성차 제조사가 차량 엔진컨트롤모듈(ECM)에 연결하는 장치로, 충돌 전후 속도 변화나 브레이크 작동 여부 등을 기록해 사고 발생 정황 파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장치다. 2012년 자동차관리법 일부 개정안이 도입되면서 차량 제조사의 EDR 기록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법정에서 급발진 인정뿐만 아니라 제조사의 책임 또한 인정되지 않는 분위기다. EDR이 오히려 완성차 업체의 ‘면죄부’로 쓰인다는 비판까지 나오면서 급발진을 규명하는 데 별 효과가 없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측정 기록이 나와 급발진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시 홍제동에서 발생한 급발진 사고와 관련한 소송에서 EDR은 쟁점으로 떠올랐다. 할머니를 포함한 도현 군의 유가족은 올해 1월 KG모빌리티(옛 쌍용차)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EDR에는 할머니가 가속페달을 100%로 밟았으며 브레이크는 전혀 밟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할머니는 차량이 뒤집히고 벽을 뚫고 나간 순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유족 대리인 법무법인 나루의 하종선 변호사는 법정에서 ‘데이터 왜곡’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동차 전자제어장치(ECU)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급발진이 발생한 경우 ECU는 가속 명령을 내린다”며 “이때 스로틀(자동차 기화기 아랫부분에 설치하는 밸브)이 완전히 개방돼 가속페달 변위량을 100%로 인식하고 이를 EDR에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ECU 결함으로 인해 EDR이 사고 원인을 운전자의 과실로 잘못 인식하는 오류가 생긴다는 것이다.
학계도 마찬가지로 EDR의 신뢰성을 의심하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100, 99, off’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공학적으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EDR 기록을 볼 때 ‘장치의 이상 유무’만 판단할 뿐 그 원인은 검사하지 않는데, 이런 상황에서 EDR은 운전자를 위한 장치가 아닌 자동차 업체의 ‘면죄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Plus Point
‘도현이법’ 논의 시작…공정위도 용역 발주국회에서는 이른바 ‘도현이법’을 포함한 4개의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에 대한 첫 논의가 시작됐다. 세부적으로 다르지만 모두 입증책임을 제조사에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다. 국회의원들은 대체로 급발진 사고의 발생 원인 입증책임을 제조사에 지도록 하자는 데 공감했다. 전문가들도 ‘소비자 권익 보호’를 강조하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생각의 전환을 촉구했다.
결과는 ‘계속 심사’였다. 더 논의하고 지켜보자는 취지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6월 22일 법안소위에서 일부 개정안에 대해서만 ‘일부 수용’ 의견을 냈을 뿐, 나머지 개정안에 대해서는 ‘신중 검토’ 의견을 냈다. 공정위 관계자는 “급발진 외 다른 사고에서 운전자가 차량 결함을 주장할 경우, 제조사는 결함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한다”며 “이런 비용은 차량 가격 인상 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현재 공정위는 차량 급발진 사고와 관련해 피해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할 필요가 있는지 등을 검토하기 위해 제조물 책임법 운용 실태조사에 관한 연구용역을 발주한 상태다. 공정위 관계자는 “연구 용역을 통해 소비자의 입증책임 완화 방안을 살펴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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