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여진의 마켓잠망경 <42>] 한국 벤처기업 살려내기 실상…천수답형 투자사 솎아낼 때
투자시장에 닥친 혹한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부 부처와 국회까지 부랴부랴 벤처기업 구하기에 팔을 걷어붙였다. 올해 4월 정부는 벤처기업 자금 지원을 위해 10조5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으며, 국회는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의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올해 하반기에도 정부는 벤처 투자 활성화를 위해 벤처 3법을 개정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조세특례제한법상의 민간 벤처 모펀드 세제 혜택을 손보고, 공정거래법상에서는 액셀러레이터(스타트업 육성 기업) 형태의 CVC(기업형 벤처캐피털) 설립 허용과 CVC 외부 출자 요건 완화 등이 주요 골자다.
민간 출자자와 CVC 등을 통해 민간 자금이 벤처 투자시장에 유입되길 바라는 정부의 의지는 물론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올해 1분기 연금 및 공제회가 신규 벤처 펀드에 작년 1분기 대비 96% 줄어든 50억원을 출자하고, 성장 금융은 75% 줄어든 639억원을 출자하는 등 정책 금융 출자자들부터가 벤처 투자 자금줄을 졸라맸다. 이를 떠올려 보면 정부 돈은 꽁꽁 싸맨 채 각종 규제 완화라는 당근으로 민간 투자를 늘려보겠다는 정부의 셈법이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지 씁쓸하다.
국내 벤처 투자 성적이 초라한 이유
미래 먹거리 기술의 연구개발(R&D) 기업은 고사 위기에 처한 한편 단기간에 실적 성장이 가능한 기업들에 투자금이 쏠리는 문제가 심각하다. 물론 외형에만 치우쳐서 투자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기는 하다. 고금리 및 고물가와 글로벌 금융기관 리스크 등 복합적으로 위기가 발발하며 전 세계적으로 벤처 투자가 위축되고 있다. 투자자들은 보수적인 투자 기조를 보일 수밖에 없다. 또한 국내는 해외와 달리 벤처 투자비 회수(엑시트) 방안이 IPO(기업공개)밖에 없다는 것도 국내 투자 환경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꼽히고는 한다.
물론 이러한 리스크를 무릅쓰고 벤처 투자라는 당위성만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 세계 최대 벤처 투자펀드인 소프트뱅크 비전펀드의 인공지능(AI) 투자 실적을 보자. 비전펀드는 2018년 이래로 AI 산업에 무려 182조원을 투자했으나 최근 들어 생성 AI(Generative AI) 기술이 결실을 보며 몸값이 오른 AI 기업들을 정작 포트폴리오에 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기업 가치가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 이상인 생성 AI 스타트업 26개 중에서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회사는 단 한 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전펀드는 그동안 그 막대한 금액을 어디에 쏟아부었을까. AI 기술 개발 기업에 투자하는 대신, 주로 AI를 활용해 빠르게 실적이 성장할 수 있는 기업들에 투자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투자비 회수가 가장 오래 걸릴 것 같고 리스크가 커 보였던 기업들이 최근 들어 가장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은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투자에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겠으나 국내 벤처 투자가 지금처럼 외형을 갖춘 기업에만 투자하는 추세라면 정작 투자 수익마저도 놓칠 수 있기에 경종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국내 벤처 투자가 안고 있는 문제가 간단하지만은 않다. 좀 더 구조적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벤처기업 액셀러레이팅(육성) 역할을 표방하는 투자기관이 너무 영세하다. 비상장 기업 투자 전문이라고 하는 투자사 중에는 AUM(운용자산)은 1조원이 넘지만, 실제로 비상장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펀드 여력은 1년에 100억원도 채 되지 않는 곳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지난 상반기 동안 단 한 차례도 비상장 기업에 투자를 집행하지 않았던 곳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사들이 개인 투자자로부터 비상장 기업 투자 명목의 투자금을 무리하게 유치하고 있다. 개인 투자자들의 경우 비상장 기업에 대한 투자 경험이나 지식이 일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인이 어떠한 리스크를 안고 비상장 기업에 투자하는지도 잘 모른 채 투자사들이나 증권사 PB들의 번지르르한 설명만 듣고 투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투자사들도 변명의 이유가 있다. 정책 자금이나 금융기관 자금을 유치해서 초기 기업에 투자해야 하지만, 현재 정책 자금 집행도 없거니와 금융기관은 요즘 비상장 기업 투자라면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개인 투자자들의 자금이라도 모아서 비상장 기업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정책 자금의 영역이 맡아야 하는 초기 기업 발굴 및 투자의 리스크를 개인이 떠안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 액셀러레이터의 투자 성적은 매우 초라하다. 거창한 실리콘밸리의 액셀러레이팅 성공 이론을 표방하는 데만 그칠 뿐 국내에서 이렇다 할 성공 사례가 거의 전무하다. 결국 벤처기업들도 이들을 외면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창업 기획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국내 액셀러레이터들의 포트폴리오에서 후속 투자를 유치한 기업들이 많지 않은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겠다.
투자사 배만 불리는 정부 지원금 손봐야
조만간 벤처 투자 시장을 둘러싼 정책을 손보는 것과 아울러 투자 주체가 본업을 가장 잘해야 하겠다. 솔직히 우리나라 VC(벤처캐피털) 및 자산운용사 등 대부분의 투자자는 단순히 투자해 놓고 IPO하는 날만 기다리는 천수답식 투자만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다. 정책 자금을 받아 수십 개의 벤처기업에 돈을 나눠서 뿌려놓고 그중 한두 종목이 운 좋게 주식시장 IPO에 성공해 이익이 나면 이를 본인들의 성과로 포장해 또 새로운 정책 자금을 받는 일이 수십 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필자가 그동안 지켜본 투자자들 중에서 본인이 투자한 벤처기업이 경영난에 빠져 허덕인다고 해서 그 회사를 주도적으로 살리려고 노력하거나 고도의 금융 기법을 활용해 기업을 회생시키는 투자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대부분의 대형 VC들조차도 수십 개 투자한 벤처기업 중 경영난에 빠져 도산위기에 몰린 기업은 아무런 회수 노력 없이 상각 처리(투자 장부에서 손실로 처리해 버림)하거나 VC들끼리 헐값에 서로 망한 벤처기업 주식을 떠넘기고 떠안아주는 행위를 일삼아 온 것이 사실이다. 정책 자금을 집행할 때 VC들의 성공 이력만 볼 것이 아니다. 투자 실패한 이력, 투자 실패 시 어떤 노력을 해서 투자금을 회수하고 벤처기업이 회생할 수 있도록 했는지를 철저히 감시했다면 이러한 투자 행태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투자자들도 미국 VC들처럼 인수합병(M&A)을 직접 주도할 수 있을 만큼 기업금융 지식과 경험을 갖춰야 한다. 정부는 위탁 운용사 선정을 잘해서 좋은 벤처기업에 돈이 흘러들어가게 해야 한다. 정부 지원금이 엉뚱하게도 투자사의 배만 불리지 않게 하려면 무조건 규제를 다 풀어서 벤처 투자 시장의 신규 진입자만 늘릴 것이 아니라 투자와 관련해 객관적 정량 지표와 회수 이력을 꼼꼼하게 요건화해 전공 학위 등으로 전문성만 앞세우는 투자사는 배제해야 한다. 이러한 역할은 국내 기관 출자자(LP)의 검증 역량을 활용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출자확약서 제출 요건을 강화해 민간 차원에서 검증을 거치도록 하고 신규 진입 VC는 오랜 검증 기간을 의무적으로 거치도록 하는 것도 유효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존의 대형 운용사들도 옥석 가리기가 필요하다. 그동안 천수답식 하늘만 쳐다보는 투자를 하던 투자사들은 과감하게 솎아내고 제대로 액셀러레이팅 역할을 할 수 있는 투자사들에만 정책 자금을 집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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