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와인 <43> 영국 왕실이 인정한 와인] 잉글리시 스파클링 와인의 매력 속으로
영국 왕실은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기념 와인을 발매한다. 202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70주년과 몇 달 전 찰스 3세의 대관식 때는 잉글리시 스파클링을 기념 와인으로 선정했다. 잉글리시 스파클링? 영국에서도 와인이 생산된다고? 조금은 의아하겠지만 잉글리시 스파클링 와인은 이미 그 품질이 상당한 수준이다. 게다가 영국은 샴페인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아닌 영국에서 샴페인이 시작됐다니 엉뚱한 말 같지만, 역사적 사실을 돌아보면 발포성 와인의 원리를 알아낸 건 다름 아닌 영국이었다.
스파클링 와인의 비밀을 밝힌 영국
17세기 영국은 프랑스 와인의 최대 수입국 중 하나였다. 유리가 귀했던 당시에 와인은 지금과 달리 배럴에 담겨 수입됐다. 배럴이 부두에 도착하면 와인상들은 와인을 유리병에 옮겨 담아 판매했는데 어떤 병에서는 기포가 발생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영국인은 이런 현상을 신기해하며 선호했지만, 기포의 압력 때문에 병이 자주 깨지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때마침 영국에서 튼튼한 유리병을 생산하는 기술이 등장했고 이는 곧 샴페인의 산업화를 가능케 한 초석이 됐다.
영국 왕 제임스 1세(1603~25 재위)는 유리 제조 시 장작 사용을 금지했다. 최대한 많은 목재를 전투함 생산에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에서는 대체재로 석탄을 이용했고 더 높은 온도에서 만들어진 유리는 훨씬 더 단단한 품질을 자랑했다. 견고한 유리병이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생산되자 와인상들은 스파클링 와인 제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들은 단맛이 나는 와인에서 기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유리병에 와인을 담을 때 설탕을 함께 넣었다.
이를 우연히 본 영국의 과학자 크리스토퍼 메렛(Christopher Merret)은 와인상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수입 와인 중에 발효가 덜 된 것에서 단맛이 났는데, 그런 와인을 병입해 코르크로 막으면 병 속에서 마저 발효가 진행되면서 기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사실을 기초로 메렛은 발효가 완료된 와인에도 당분과 효모를 추가하면 재발효가 일어나며 기포가 생성된다는 것을 알아냈고 1662년 이를 학술지에 게재했다. 프랑스가 이 원리를 도입해 샹파뉴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샴페인을 생산하기 시작한 때가 1709년이니, 영국은 그보다 50년 앞서 스파클링 와인의 비밀을 밝힌 대선배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왜 영국에서는 와인 생산이 활발하지 않았을까. 영국에 와인이 전파된 것은 기원전 50년 로마가 브리튼 섬을 지배하면서였다. 11세기 토지 대장에 따르면 잉글랜드에 47곳의 포도밭이 있었고 영국이 가톨릭 국가였을 때까지도 와인 생산은 유지되고 있었다. 성직자들이 교회 땅에 포도를 심고 와인을 만들어 수도원을 운영하고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성공회를 창시하고 모든 교회를 국유화하자 와인 생산은 점점 줄어들게 됐다.
영국 남서부는 포도 재배에 알맞은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샹파뉴와 토질이 비슷하다. 과거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작은 강이 흘렀는데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때 북극의 빙하가 녹아 강이 바다가 되면서 영국이 섬이 됐다. 영국 남서부가 샹파뉴보다 위도가 1도 높아 기후가 더 서늘하긴 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후 변화 때문에 샹파뉴의 연평균 기온이 높아졌고 과거 샹파뉴의 기후가 영국 남서부에서 나타나고 있다. 요즘은 잉글리시 스파클링 와인이 샴페인 본연의 맛을 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英 최고 스파클링 와인 생산자 거스본
하지만 잉글리시 스파클링 와인의 총생산량은 연간 1000만 병 수준으로 3억 병을 생산하는 샴페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지만, 다행히 거스본(Gusbourne)이 수입되고 있어 반가운 마음이다. 거스본은 영국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 생산자로 왕실의 기념 와인을 생산한 곳이다. 켄트(Kent)에 위치한 거스본은 중세 시대 그곳 영주였던 존 드 구스본(John de Goosebourne)의 이름을 땄다. 구스본은 ‘거위가 모여 사는 시냇물’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 지역에는 우기인 겨울에는 흐르지만, 건기인 여름에는 사라지는 작은 하천이 있다고 한다. 거스본은 켄트와 웨스트 서식스(West Sussex)에서 포도를 재배한다. ‘영국의 정원’이라 불릴 정도로 기후가 온화한 켄트에서는 달콤한 향이 풍부한 포도가 생산되고 웨스트 서식스의 포도 맛은 산미가 경쾌하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섞어 만든 거스본의 와인은 감미롭고 풍성한 아로마와 산뜻한 맛이 특징이다.
현재 국내에 수입되는 거스본의 스파클링 와인은 네 가지다. 샤르도네 100%로 만든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은 사과와 레몬 등 싱그러운 과일 향과 사과파이와 토스트 등 달콤한 풍미의 조화가 매력적이다.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리지만, 해산물 요리에 곁들이면 더없이 좋은 궁합을 맛볼 수 있다. 피노 누아 100%로 만든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s)는 오렌지, 복숭아, 체리 등 과일 향이 풍부하고 질감이 부드러워 치즈나 육포 같은 간단한 스낵과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를 블렌드해 만든 브뤼 리저브(Brut Reserve)는 아로마가 상큼하고 생동감이 느껴져 장어나 튀김처럼 기름진 요리에 곁들이면 산뜻한 여운이 음식의 뒷맛을 개운하게 씻어준다. 마지막으로 로제는 붉은 사과, 딸기, 체리 등 과일 향이 싱싱하고 약간의 향신료 향이 복합미를 더해 가벼운 육류나 매콤한 우리 음식과 잘 맞는다. 샴페인과 굳이 비교하자면 잉글리시 스파클링 와인은 보다 신선하고 상쾌한 풍미가 더 강하다. 유난히 찜통더위가 예상되는 올여름에는 아마도 잉글리시 스파클링을 더 자주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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