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K바가지'…신뢰 쪽박난 사회
"불신한국 단면"…사회적신뢰지수 세계 107위
◆ 신뢰 바닥난 대한민국 ◆
난임 문제를 겪고 있는 직장인 서 모씨는 최근 용하다는 서울시내 한 한의원을 찾았다가 귀를 의심했다. 의사가 권한 한 달치 한약 가격이 200만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서씨는 "약에 황금을 갈아 넣은 것도 아닐 텐데 너무 과한 것 같다"며 "절박한 사람들 심리를 파고들어 대형 바가지를 씌우려는 것 아니냐"고 쓴웃음을 지었다.
40대 회사원 진 모씨는 얼마 전 서울 영등포 인근 노래방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1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고 난 뒤 청구된 가격이 무려 9만원이나 나와서다. 진씨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항의하자 주인은 "코로나19로 영업을 못해서 너무 힘들었다. 웬만하면 양해하고 계산해달라"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가격을 부풀리는 '바가지'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전통시장, 지역축제, 명동 등 관광객이 몰리는 장소는 물론이고 한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영역에서 '내일은 없다' 식의 바가지 영업이 판을 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상인 개개인의 욕망 차원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불신 사회'의 한 단면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한다. 사회적 신뢰가 붕괴하면서 서로 속고 속이는 범죄나 일탈 행위가 많아졌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상도의가 무너졌다는 얘기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 공동체 구성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며 "한국에서 사회적 신뢰가 낮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바가지의 사전적 의미는 '턱없이 높은 가격에 물건을 사게 돼 속는 것'이다. 전세사기·주가조작·보이스피싱처럼 최근 한국 사회를 뒤흔든 각종 사기성 범죄도 넓게 보면 바가지의 '범죄 버전'에 속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구성원 간 신뢰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신뢰 파괴 범죄'는 증가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전세사기 검거 건수는 지난 16일 누적 기준 862건이었다. 2022년(387건) 한 해 동안 검거한 건수를 이미 두 배 이상 넘어선 것이다. 2021년 187건과 비교하면 4배를 뛰어넘는 수치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사기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범죄"라면서 "구성원들이 사회를 신뢰하지 않는 '불신 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저신뢰 사회는 수치로도 증명된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이 경제·사회적 자본 등을 토대로 발표하는 '2023 레가툼 번영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지수는 세계 107위였다. 종합 순위는 29위.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신뢰·유대감과 같은 공동체 지수는 낙제 중 낙제라는 의미다.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 안팎의 선진국에 도달한 대한민국이지만 사회적 신뢰는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원칙과 법치를 확립하는 것이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치인들의 비리 행위가 끊이지 않는데, 그에 대한 처벌이나 수사는 지지부진한 사례가 많다.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 파괴 행위를 부추기고 솜방망이 처벌로 사기·주가조작·바가지 등이 더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예빈 기자 / 박나은 기자 /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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