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영의 이제 좀] '진상'과 민주주의
[미디어오늘 황두영 작가]
한 젊은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에 대한 공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많은 시민들은 이번 사건에 놀라거나 안타까워 하거나 슬퍼하는 걸 넘어 공분하고 있다. 교직이랑은 무관한 나조차도 내 일부가 죽은 것만 같은 감정이 들어 스스로 당혹스럽다. 그만큼 우리 모두가 '진상' 때문에, 더 정확히는 '진상'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노동환경 때문에 상처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나도 국회의원실에서 일할 때 진상 민원을 지독히도 많이 겪었다.
정치적 이견에 따른 분노를 퍼붓는 이들은 차라리 참을 만 했다. 동성애자는 지옥불에 떨어져야 한다는 걸 복창하게 한 분은 도무지 참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주로 부동산 관련 민원들이었다. 그들은 지하철 연장 같은 지역발전 이슈를 서둘러 달라고 나를 들들 볶았다. 그들은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내 개인 휴대폰 번호를 공유하며 낮밤 없이 괴롭혔고, 아무 때나 사무실에 쳐들어와 업무를 방해했다. 그들은 내가 무능력하고 공직자로서의 윤리가 없다며 비난했다.
나를 더 괴롭혔던 건 그들이 나에게 조금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SNS모임에 들어가면, 그들은 나를 비롯한 관계자들을 언제,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니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항의를 했는지를 공유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우리 아파트 단지의 집값을 올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렇게 성전(聖戰)을 벌였노라 하는 영웅서사들을 털어놓았다. 나는 범죄자도 적도 아닌데도, 나의 괴로움이 그들에게 업적이 된다는 게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들에게 진상짓은 덕목이었다. 본인, 본인이 가진 것, 본인의 가족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한계 없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라클 모닝이나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는 것 마냥 최선을 다하는 스스로에 취해 있었다.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이며, 보통의 사람들을 하지 않을 과도하게 적극적인 무엇인가를 해야 내 가치를 높일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나와 내 자식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 여겼다. 신자유주의의 악귀가 된 이들에게 작작 좀 하라는 말은 도무지 먹히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진상짓의 대상이 되는 노동자인 내가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결국 그들을 위해 뭐라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신설 지하철역의 위치를 정하는데, 한창 집값이 폭등한 신축 아파트 단지와 교통약자들이 많이 사는 오래된 동네 사이 어디쯤으로 정해야 한다고 하자. 나는 신축단지에 민원이 많으니 그쪽에 더 가깝게 해야 한다고 관계기관에 의견을 전달할 것이다. 그들은 더 조직적으로 날 더 괴롭히기 때문이다. 난 더 이상 합리적으로 유권자의 필요를 판단할 능력과 의지를 상실한다. 끝까지 공정함을 지키려 했다면 난 잘리거나 미쳤을 것이다. 아니, 이미 조금은 미쳤는가.
진상은 민주주의에 어떤 해를 끼치는가. 진상짓을 하는 짓과 당하는 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상은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이건 교사의 교육활동이건 공적 자원을 우악스럽게 아전인수 하면서, 공적 자원의 공정한 배분을 훼손한다. 공교육의 교실에서도 자기 자식은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 명품 아파트를 지었으니 공적 인프라도 당겨와야 한다고 믿는 자들에게 나머지 사람들은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유권자로서의 각자의 고유한 권리가 무엇인지가 흐리멍텅한 우리 사회는 진상의 놀이터가 된다.
평범한 유권자들의 뜻이 잘 반영되지 않는 정치구조는 정치를 진상의 먹잇감으로 만든다. 그러는 사이 시민들은 나도 진상을 부려야하는 것 아니냐는 열패감과 죄책감에 빠진다. 정치인들은 공무원들과 정치노동자들을 진상을 막기 위한 녹물필터쯤으로 쓰다 버리고, 유권자의 목소리를 잘 듣는 척 하는 이미지만을 옥수처럼 챙길 뿐이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악쓰기 대회로 전락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멈추기 위한 우리의 사회계약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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