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유출한 기업에 유리한 재판 과정....피고인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
피고인들, 檢 증거 부동의해 현출 막으려 안간힘
법조계 “피해 기업 목소리 재판 과정서 반영돼야”
최근 기술유출이 사회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피고인 방어권에 초점을 맞춘 현행 재판절차가 기술유출 기업의 피해를 키운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형사소송법상 피고인 측이 새로운 증거를 내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더라도 검찰이 재판 진행 중에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추가 증거를 내기 어렵고, 피해기업도 유출된 기술의 가치를 설명하는 의견서조차 제출할 수 없어 피해 여부를 정확히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피해 기업 스스로 충분히 상황을 전달할 수 있는 방편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반적인 형사재판의 절차는 검사의 기소로 시작된다. 검찰이 수사하며 확보한 증거를 정리한 뒤 목록 형태로 작성해 공소장과 함께 법원에 제출한다. 이후 재판부가 지정되고 재판이 열리면 피고인 측은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는 각종 참고인 조서나 피의자신문 조서 등이 포함돼 있다.
‘기술 개발 경위’ 등을 놓고 무죄를 다투는 피고인들은 대체로 피해 기업 엔지니어들의 조서 등 증거를 모두 부동의한다. 형사소송법상 조서들을 피고인 측이 동의하지 않으면, 해당 엔지니어들을 불러 법정에서 증인신문을 진행해야 한다. 이때 피고인들은 피해 기업이 입은 손실 정도가 크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 피해자 측 증인의 발언을 공격하곤 한다. 피해자 증언의 신빙성을 낮추기 위한 일종의 재판 전략이다. 대부분의 기술 유출 사건에서 피고인들은 이와 유사한 전략을 쓴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최근 삼성 디스플레이의 핵심 기술인 3D라미네이션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톱텍 사건 재판 과정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삼성의 오랜 협력사였던 톱텍은 삼성 디스플레이의 영업 비밀인 핵심 기술 자료가 담긴 설비를 중국에 몰래 넘겼다는 혐의를 받았다. 톱텍 측은 “삼성이 영업 비밀이라고 특정한 정보는 이미 공개돼 동종 업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또한 기술 개발 과정에서 톱텍이 개발한 부분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관련 증거를 새롭게 제출하는 바람에 ‘해당 기술이 둘 중 누구의 영업비밀인지’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검찰은 기술 개발 경위를 설명한 삼성 디스플레이 엔지니어들의 조서 등을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신청했지만, 톱텍이 이를 모두 거부했다. 결국 삼성의 엔지니어들을 증인으로 소환해야 했다. 통상 기업의 핵심 기술은 엔지니어 여러 명이 개발하는데, 이들 모두를 상대로 증인신문을 진행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제약이 있는 점을 피고인이 노린 것이다.
삼성 측을 대리한 정창원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개발에 관여한 엔지니어들 모두가 법정에서 진술하지 않으면 증거 채택이 어렵다”며 “해당 기술이 삼성과 피고인의 공동 개발이었던 만큼 기술 개발 과정에서 삼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 공판에 관여한 검사는 “법정에선 피해자 측 엔지니어들을 대신해서 검사가 설명해야 하는데, 엔지니어들이 직접 증언하는 것에 비해 내용을 전달받아 대신 설명하는 것은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증인신문 과정 역시 피고인에게 유리한 건 마찬가지다. 피고인의 변호인 측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자료 영상을 띄워놓고 증인으로 나온 엔지니어들을 강도 높게 압박한다. 반면 법정에 영상 관련 자료를 제출할 수 없는 엔지니어들은 오롯이 본인 기억에 의존해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인 셈이다.
기술유출 피해를 입은 다른 기업 사건을 대리한 또 다른 변호사는 “생업이 있는 엔지니어들은 과거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볼 시간도 없다”며 “재판부에 기술유출 현황을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증인신문 과정에서 종종 피해자 측 엔지니어에 대한 인신공격이 이뤄진다는 점 역시 문제점으로 꼽힌다. 한 검사는 “피고인 측이 ‘너희(엔지니어)들이 (기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 아니냐’ ‘검찰과 (피해를 입었다는) 대기업이 결탁한 것 아니냐’는 등의 공세가 이어진다”며 “피해자 측 증인들이 상당히 모멸감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 변호사는 “증인인 엔지니어를 상대로 한 공격이 이어져도 변호사 등 법적 대리인들이 여기에 관여하지 못해 증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범죄의 성립 여부와 관련해 피고인의 동의 없이 피해자 대리인의 진술 기회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피해자 측은 제2의 기술유출이 이뤄질 것을 우려해 피고인 주장을 반박할 자료를 내고 싶어도 증거 제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대형 로펌의 기업 전문 변호사는 “피고인 측은 제출된 증거를 모두 열람·등사할 수 있다”며 “민사의 경우 ‘비밀유지 명령’이 있지만, 형사재판에는 없어 또 다른 기술유출 위험이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법조계와 업계에서는 “피해기업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의 판단 과정에서 기술이 어느 정도 가치를 지녔는지가 처벌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만큼 피해자가 스스로 설명할 통로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정 변호사는 “기술유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더라도 기술유출 재판 절차 자체가 일반 형사소송법으로 진행하다보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면서 “특허청에서도 절차 개선에 관해 노력하고 있지만,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지는 의문이다. 개정을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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