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은 책은 ‘북트럭’ 아닌 ‘책수레’에 놓아주세요”
아이들이 많이 찾는 도서관에
정체불명 낯선 외국어로 안내
중고생들이 공모전 통해
‘갓생’을 ‘멋생’으로 제안하기도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책읽는 서울광장’과 종로구 ‘광화문 책마당’을 찾았다.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이날 책읽는 서울광장과 광화문 책마당은 ‘독서 여행’에 나선 가족, 친구, 연인들로 북적였다. 이날은 서울광장에서 ‘어린이가 꿈꾸는 세상’을 주제로 어린이합창단 공연 등 특별 프로그램이 열려 이곳을 찾은 어린이들이 재미를 만끽했다.
책읽는 서울광장은 크게 리딩존, 공연존, 팝업존, 놀이존으로 구성돼 독서도, 공연도, 놀이도 붐빔 없이 정해진 공간에서 잘 즐길 수 있다. 여기서 리딩존, 팝업존 등의 외래어는 어린아이나 어르신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만큼 리딩존은 ‘독서구역’ ‘독서장’으로, 팝업존은 ‘행사구역’ ‘행사장’으로 바꾸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11개의 큰 주제로 구분한 서가는 문학, 과학기술, 육아, 건강, 여행, 그림책 등 다양한 영역의 책들을 취향에 맞게 선택해 읽은 뒤 책을 가져온 서가에 반납하면 되는 형식이라 편리했다. 다만 서가 설명 중 ‘덕질을 읽다(Mania)’ ‘언타이틀을 꿈꾸며’ 등 외래어와 신조어가 포함돼 있어 아쉬웠다.
■ 덕질 대신 ‘애호, 애호하다’로
덕질은 외국어와 순우리말이 합쳐진 신조어로,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オタク, 오타쿠→오덕후→오덕(덕후)→덕)에서 바뀐 ‘덕’과 행위를 뜻하는 ‘질’이 합쳐진 말이다. 국립국어원은 덕질을 ‘어떤 분야나 사람을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로 설명했는데 덕질 대신 ‘애호, 애호하다, 애호가’ 등의 표현을 문맥에 맞게 쓰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언타이틀을 꿈꾸며’에서 언타이틀(Untitle)은 ‘제목없음’ ‘무제’를 뜻하는 외국어로, 한글문화연대 ‘쉬운 우리말 사전’에선 타이틀을 ‘제목’ ‘표제’ ‘직함’ 등으로 바꿔 쓸 수 있다고 밝혔다.
책읽는 서울광장을 둘러본 뒤 이번엔 바로 옆에 자리한 서울도서관으로 향했다. 2층 일반열람실에 들어서자 북큐레이션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북큐레이션은 특정한 주제에 맞는 여러 책을 선별해 독자에게 제안하는 것을 말하는 신조어로, 쉬운 우리말 사전에선 ‘책 추천’ ‘책도우미’ 등으로 순화해 쓸 것을 추천했다. 발길을 서가 쪽으로 돌리니 곳곳에 ‘다 읽은 책은 북트럭에 놓아주세요’란 표현도 보였다. 북트럭은 사서들이 도서관 자료를 좀 더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책수레’ ‘책바구니’ 등의 우리말로 쓰면 좋지 않을까?
두 딸과 함께 서울도서관을 찾은 윤희성씨(38)는 “아이들이 책읽기를 좋아하고 오늘은 동화를 읽어주는 행사도 있어서 모처럼 이곳을 찾았다”며 “다만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영어 표현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게 다소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이날 광화문광장에서도 야외에서 독서를 즐기는 광화문 책마당이 펼쳐졌다. 광화문 책마당은 야외공간인 육조·놀이마당과 실내공간인 광화문라운지, 세종라운지로 구성됐다. 이날은 초등학생들이 책마당을 찾아 이곳저곳 신나게 둘러보고 있었다. 집 가까운 곳에 캠핑하듯 놀러와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설레 보였다.
■ ‘갓생’보다 재치 넘치는 ‘멋생’
야외마당을 지나 실내마당인 세종라운지로 들어서니 안내판에 큼지막하게 ‘취향에 취하는 나에게 치얼스’라는 표현이 보였다. 이곳에서 만난 몇몇 어린이들에게 이 표현의 뜻을 이해하느냐고 물으니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어스(cheers)는 영미권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건배를 할 때 쓰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바쁜 도심 한가운데서 도서와 문화 프로그램으로 여유와 위안을 찾아준다는 의미지만 아이들이 많이 찾는 공간인 만큼 조금 더 쉬운 말로 써놨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든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9번 출구와 연결된 광화문라운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리집에선 이곳을 ‘바쁜 일상 속에서 갓생을 찾다…오늘, 광화문라운지 해치마당’으로 소개했다. 갓생은 신을 의미하는 ‘God’와 인생을 뜻하는 ‘생’의 합성어로, 부지런하고 생산적인 삶 또는 일상에서 소소한 성취감을 얻는 일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다. 이런 신조어를 일부에선 사회현상을 담은 재치 있는 표현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세대 간 소통이나 정확한 의미 전달을 어렵게 하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5월 울산광역시교육청이 실시한 ‘우리말 다시쓰기’ 공모전에서 중고생들은 갓생을 ‘멋생’으로 다듬어 쓸 것을 제안했다. 재치 넘치는 우리말 순화어다.
그동안 서울시는 올바른 우리말 쓰기를 실천하고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특히 광화문광장에 ‘세종이야기’ 전시관을 운영하며 시민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광화문광장 한쪽에 자리한 책마당에선 정체불명의 외래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도서관은 아이들이 많이 찾는 공간이다. 그만큼 어린이들이 말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글·사진 나윤정 객원기자
감수: 서은아 상명대 계당교양교육원 교수
공동기획: 한겨레신문사 (사)국어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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