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노화 원리 찾으면 … 암·치매 '정복' 길 열린다
지난해 말 한국과 중국, 일본 3개국 연구기관이 이례적으로 뭉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연구재단과 중국 국립자연과학기금위원회(NSFC), 일본과학기술진흥회(JSPS)가 공동으로 돈을 모아 특정 연구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 과학기술 연구를 선도하는 3개국의 연구기관이 공동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어떤 연구 주제가 선정될지 관심이 쏠렸다.
이달 11일 뚜껑이 열렸다. 연구 주제로 세포 노화가 선정됐다. 노화 관련 질환을 유발하는 세포 노화 현상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는 데 이성배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뇌과학과 교수를 포함해 국내 연구자 7명, 중국 연구자 4명, 일본 연구자 14명 등 3개국 총 25명의 연구자가 의기투합했다.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한·중·일 연구기관들이 함께 머리를 맞댄 것이다.
세포 노화는 세포가 증식을 멈추는 현상을 뜻한다. 노화가 생명체가 시간이 흐르며 생존과 생식력에 필요한 생리적 기능이 떨어지는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듯 세포 역시 같은 현상을 겪는다. 제한된 수명을 살도록 설계돼 있다. 우리 몸은 1개 수정란에서 출발해 수십조 개에서 수백조 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는데 활발히 성장하는 기간에는 몸을 키우기 위해, 성장을 멈추면서는 마멸에 의해 없어지는 세포를 보충하기 위해 세포를 분열한다. 이런 분열을 하는 세포가 줄기세포들인데 이 줄기세포들의 분열 수명이 무한대이지 않다. 주어진 분열 수가 고갈되면 증식을 멈추고 세포 노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따르면 세포가 노화된다는 사실은 1960년대 밝혀졌다. 미국 과학자 레너드 헤이플릭 박사가 인간 세포가 60~70회 정도 분열하고 나면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 세포가 끊임없이 분열할 수 있다는, 당시 공고했던 과학계 정설을 뒤집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발견에도 세포 노화는 한동안 실험실 세포 배양 환경에서 나타난 이상한 부작용으로 치부됐다. 그러다 최근 20~30년 사이 세포 노화 연구가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의료 기술 발달과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로 인간의 기대수명이 최근 크게 증가하면서다. 가령 지난 6월 기준 유럽 인구의 약 9%가 65세 이상이다. 2050년이 되면 이 비율이 25%까지 늘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노인 인구가 늘면서 노인성 질환과 만성질환 발생률이 급증했다. 수명만 늘고 건강한 삶은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노인성 질환과 만성질환 발생률 급증의 원인으로 세포 노화를 꼽는다. 세포 노화가 시작되면 정상적이지 못한 세포들이 쉽게 제거되지 못한 채 비정상적인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우리 몸의 세포와 DNA를 공격해 고혈압, 천식, 알레르기, 협심증, 부정맥 등 각종 만성질환과 노화를 불러오는 주범인 활성산소가 세포 내 늘어나게 되고, 손상을 입은 단백질도 많아진다. 얼마 전까지 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노화세포가 많을수록 증상이 더 악화되는 현상이 관찰됐다. 다만 세포 노화가 나쁜 결과만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주앙 페드루 드 마갈량이스 영국 리버풀대 생물학부 교수 연구팀은 세포 노화가 암의 진행에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노화세포'에 2019년 발표한 바 있다. 연구팀은 암이 생기면 유전자 발현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9개의 인체 조직에서 비교 분석했는데, 세포 노화와 관련된 유전자 발현이 많을수록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갈량이스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축적된 유전자 돌연변이는 암의 주요 발병 원인이지만, 노화 조직은 세포 증식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암도 예외는 아니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세포 노화의 원리를 규명한다면 각종 노인성 질환과 만성질환 발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암세포 증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세포 노화와 관련해 현재까지 알아낸 과학적 분석들을 종합하자면 세포 노화는 '텔로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텔로미어는 염색체의 '뚜껑'이라고 불린다. 마치 신발끈 끝에 있는 캡이 신발끈을 구성하는 실들이 풀리는 것을 막아주듯, 염색체가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염색체 말단에 위치하고 세포가 분열할수록 짧아진다. 텔로미어가 일정 크기 이하로 짧아지면 말단이 노출된다. 세포는 이를 DNA가 잘린 것으로 오인하고 교정에 나선다. 이때 세포는 분열을 멈춘다. 하지만 말단이 노출된 DNA는 교정할 수 없다. 세포가 다시 증식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포가 지정된 분열 수를 채우지 못하고 세포 노화 상태에 돌입할 수도 있다.
세포 노화는 세포 손상을 유발하는 외적 요인에 의한 영향도 받는다. 미세먼지의 중금속 같은 환경오염 영향으로 후성유전학적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 후성유전학적 변형은 비정상적인 유전자의 발현을 유도해 세포 변형을 일으킬 수 있고, 이는 세포 노화의 원인이 된다. 비만도 세포 노화를 가속화한다. 김재범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5월 비만 시 내장지방에서 지방세포 노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유도됨을 발견했다고 국제 학술지 '셀 메타볼리즘'에 발표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비만으로 인한 지방세포 내 DNA 손상 축적이 세포 노화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화지방세포의 축적은 지방 조직 염증 반응과 인슐린 저항성을 일으켜 대사성 질환을 유발하는 기전도 밝혔다. 과학자들은 세포 노화 연구는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연구 분야라고 입을 모은다. 이성배 교수는 "노인성 질환이나 만성질환에 대한 원천 예방책 혹은 치료법을 찾으려면 세포 노화를 연구해야 한다"며 "나이 든 생쥐에게 젊은 생쥐의 피를 수혈했을 때 젊어지는 효과가 있었다는 보고가 나오는 등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세포 노화 현상의 원리가 많다"고 말했다. 혈장 치료제 스타트업 '유반리서치'는 어린 쥐에게서 채취한 혈장을 주입했더니 47개월을 살아 기존 과학 논문에 발표된 최장수 쥐의 기록인 45.5개월을 넘었다고 지난 2월 발표하는 등 비슷한 결과가 이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또 국가별로 특화된 세포 노화 세부 연구 분야가 다른 만큼 세포 노화 연구는 국제 협력이 꼭 필요한 분야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노인성 질환과 관련된 세포 노화 연구를, 중국은 대규모 세포 노화 데이터베이스 연구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노화 연구의 전통적 강자인 일본은 세포 노화와 관련된 바이오마커 발굴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 교수는 "3개국 연구기관이 공동으로 세포 노화 연구에 나서는 이유"라며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 교류 속에서 세포 노화 원리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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