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민원 넘쳐나는 사회...피해자 컴플렉스, 낮은 신뢰도가 원인

김태호 기자 2023. 7. 2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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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교사가 담임?” 1년 내내 민원
변호사·노무사 등 전문직도 과도한 민원 시달려
폭력 등 민원인 위법행위도 50%↑

고등학교 교사 정모(27)씨는 임용 첫해만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질 않는다. 정씨는 임용 첫해인 지난 2021년 경기 시흥시의 한 중학교에서 일하며 한 해 내내 학부모 민원에 시달렸다. 민원을 넣는 학부모는 3월 학기 초부터 정씨에게 “신규 교사가 중학교 3학년 담임을 맡는 게 말이 되냐”부터 시작해 각종 트집을 잡았다. 한번은 “정씨를 담임에서 바꿔달라”는 내용을 담은 A4 용지 3장의 자필 편지를 써서 교장에게 보내기도 했다. 정씨는 “그토록 원하던 교직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악성 민원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 탈모가 생겼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에서 2년 차 신입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과 관련해 교직 사회에선 학부모의 지속적인 민원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민원에 시달리는 직업군은 교사 뿐만이 아니다. 대민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과 전문직 종사자들도 이번 일을 두고 “남일 같지 않다”고 말한다. 본인의 요구사항에 100% 맞춰주지 않는다며 도를 넘은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전문가들은 ‘나는 피해자’라는 인식이 깔린 사회 구성원들이 국가 기관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다 보니 일부가 과격하게 목소리를 내 악성 민원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조선DB

24일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언어·신체 폭력 등 민원인 위법행위는 5만1883건이다. 이는 2018년 3만4484건보다 50.3% 증가한 수치다. 최근 서울 서초구 서이초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초등교사 일기장에 업무 스트레스 관련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교사들의 스트레스를 짐작할 수 있는 교육활동지원센터 이용 건수도 최근 크게 뛰었다. 교육활동지원센터란 교육활동 침해 피해를 받은 교원에 대한 심리치료 등을 지원하는 기구다. 한국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학기 동안 교원치유지원센터를 이용한 건수는 3만6367건으로 2021년 한해 이용 건수인 3만3704건을 이미 뛰어넘었다.

◇ 경찰·교사·노무사 “민원은 일상… 민원 스트레스로 박탈감도”

교단 위 교사들은 민원 스트레스는 일상이라며 서이초 교사의 극단적 선택에 많은 교사들이 분노하는 것도 일상 속 스트레스를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씨는 “동료 교사 대부분이 소셜미디어(SNS) 프로필을 근조 리본으로 바꿨다”며 “심지어 학부모 민원이 심하다고 소문난 신도시 지역에 근무하기를 꺼리는 분위기도 교사들 사이에 있다”고 귀띔했다.

일선 현장에서 민생치안을 도맡은 경찰도 민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3년 차 순경 최모(27)씨는 지난해 여름 층간소음 신고 현장에 출동했다. 층간소음 분쟁은 원칙적으로 경찰이 적극 개입해서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민원인은 최씨의 이 같은 설명에도 불응하며 최씨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는 등 크게 항의했다. 최씨가 현장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지구대로 전화해 최씨를 찾으며 항의하기도 했다. 최씨는 “당시 상관이 중재해줘서 별 탈은 없었지만 이런 악성 민원이 종종 있다”며 “동료 경찰들도 ‘과도한 민원은 업무 사기를 저하시키는 게 사실’이라고 말한다”고 토로했다.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것은 비단 공무원뿐만이 아니다. 매일 같이 사건을 통해 의뢰인을 대하는 변호사·노무사들도 민원과 비슷한 과도한 요구사항이 폭언 혹은 신체적 위협으로 이어져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한다. 20대 노무사 조모씨는 최근 모 기업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조사하다가 해당 사건이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피해를 호소했던 신고자로부터 “내가 자살하면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해 줄 것이냐”는 전화를 받았다. 조씨는 “이런 식의 항의성 연락이 오는 것은 예사”라며 “동료 노무사들도 업무 외 민원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에는 대구에서 50대 남성이 재판 결과에 앙심을 품고 변호사 사무실에 불을 질러 7명이 숨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에는 서울에서 이혼소송을 준비 중인 40대 남성이 아내 측 변호사 사무실로 가 위자료를 낮춰달라며 흉기를 휘두른 사건도 있었다.

지난해 6월 13일 오후 대구 중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대구 법률사무소 방화 참사 희생자 합동추모식에서 유족 대표가 헌화하고 있다. /뉴스1

◇ 전문가들 “피해자 콤플렉스 사회가 원인”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피해자 콤플렉스’와 ‘낮은 신뢰’에서 악성 민원의 뿌리를 찾았다. ‘나는 피해자’라는 인식이 깔린 사회 구성원들이 국가 기관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다 보니 일부가 과격하게 목소리를 내 악성 민원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의 ‘억울함’을 지적했다. 곽 교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경제 발전이 급격하게 되다 보니 빈부격차가 벌어졌고 여기에 SNS를 통해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는 현상이 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모습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억울함이 잘못 표출된 게 악성 민원”이라며 “민원을 제기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민원을 강하게 넣어 보복하고 쾌감을 느끼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했다.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부·권력·명예 등을 얻을 기회의 문이 좁다”며 “자신이 노력해도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악성 민원을 규정하고 딱 잘라 없애는 건 불가능”이라며 “사회 독점 구조를 허물고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신뢰 역시 정부에서 기관을 새로 만든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교육 과정에서부터 사회 구성원에 대한 신뢰를 불어넣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서울 서초구 서이초 앞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교사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 있다. /김민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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