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 “실제론 팜 파탈 아냐···38년차 장단점 다 아는 배우, 여전히 기다려줘 감사”[인터뷰]
너 나 모르냐?
가족처럼 지냈지만 사고로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모른 지 3년. 고향으로 돌아온 춘자는 자신을 적대하는 진숙에게 묻는다. 열네 살 식모살이를 시작으로 어촌마을 군천에 이른 혈혈단신 춘자는 배우 김혜수가, 선장인 아버지와 함께 마을 사람들을 어우르고 이끄는 해녀 진숙은 염정아가 연기했다. 춘자의 “너 나 모르냐”는 깊은 애정, 서운함, 간절함이 담긴 말이다. 올 여름 최고 기대작 <밀수>는 뜨겁고 복잡다단한 관계를 가진 두 여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모두가 아는 얼굴을 가지고 새로운 인물을 연기한 두 사람을 이틀에 걸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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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자의 키워드는 생존이죠. 홀로 떠돌이의 삶을 사는 여자예요. 정착을 한 듯 보여도 속으로는 ‘나는 정착을 할 수 없다’는 불안이 늘 존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보통 두 종류로 나뉠 것 같아요. 존재를 무력화시키면서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 혹은 반대로 그렇지 않은 듯 겉으로 제스처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저는 춘자는 후자 쪽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생존’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했죠.”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춘자의 캐릭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춘자는 “본능, 감각, 직관에 의존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는 “권상사를 처음 만났을 때 춘자는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그런데 큰소리로 발악을 한다. 불안한 사람은 궁지에 몰릴 때 더 목소리가 커지지 않나”라며 “자기 수가 바닥났다는 걸 알면서도 임기응변으로 살아남으려고 한다. 순간 칼질을 모면하기 위해서 ‘군천’을 말한다. 자신이 어디로 피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 <밀수>는 어촌마을 군천에 사는 해녀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마을에 화학공장이 들어선 뒤부터 해녀들의 수확이 변변찮아 진다. 셈이 빠른 춘자를 필두로 해녀들은 밀수에 손을 댄다. 어릴 적부터 가족처럼 지낸 진숙도 함께 세관을 피해 바다에서 라디오, 바세린, 화장품, 옷 등 ‘외제 물건’이 담긴 상자를 건져 올린다. 그러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며 춘자, 진숙을 비롯한 해녀들은 생이별한다. 3년 뒤, 춘자는 더 큰 밀수 건수를 들고 군천으로 온다. 진숙은 3년 전 사건의 배후에 춘자가 있다고 의심한다.
“춘자는 외롭고 불안정하잖아요.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만 드러내죠. 그 순간 자신을 지키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요. 그건 춘자의 진심은 아니죠. 춘자가 진짜를 드러내는 건 단 한 사람 앞에서예요.” 김혜수가 말하는 ‘단 한 사람’은 진숙이다. 아무리 진숙이 춘자를 미워해도, 춘자는 진숙 앞에서만은 위장하지 않는다.
과잉된 행동으로 상대방을 홀리는 춘자와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신중하게 행동하는 진숙은 상반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김혜수는 “진숙의 아버지는 선장이고, 배도 가졌다. 많은 동네 사람들이 선장과 진숙을 의지한다. 부녀는 거기에 걸맞은 진중함과 책임감을 가졌다”라며 “반면 춘자는 늘 착취당하고, 얻어맞고, 들이받으며 고달프게 살아왔다. 그러다 처음으로 진숙을 통해 따뜻함과 안락함을 경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춘자에게 진숙이란 “첫 가족, 단짝, 어쩌면 전부”라고 했다.
춘자와 진숙은 극 중 두 번, 물 속에서 단둘이 만난다. 한 사람은 물 위로 올라오고, 한 사람은 물 안으로 들어가며 교차하는 순간 서로를 맞잡아 끌어준다. 김혜수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이 장면에서 진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물속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팔을 내밀어 서로 끌어주는 존재라는 것, 그렇게 시작했고 많은 세월과 여러 사건을 겪고 나서도 더 세게 서로를 이끌어주는 존재로 남아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면”이라며 “저도 그 장면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김혜수와 염정아는 1996년 방영된 MBC 드라마 <사과꽃 향기> 이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김혜수는 “정아씨 연기를 정말 좋아한다”며 “꾸준하게 성장하고, 버텨주고, 확장해나가는 배우라는 것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배우들은 흔치 않다. 배우로서 임팩트도 있지만, 현장에서는 굉장히 유연하고 둥글둥글하다”고 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두고 “다른 기질의 배우가 만나 서로 배우고 시너지를 낸,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김혜수는 영화 <도둑들> 촬영 당시 수갑을 차고 차에 탄 채 물에 빠지는 장면을 찍다 공황 상태를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이번 영화 촬영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도둑들> 촬영) 당시에는 공황인지 몰랐어요. ‘나 왜 이러지’가 제일 컸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공황 상태였고, 그 이후로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이번 작품은 역할도 해녀였고 수중 촬영 비중이 많았는데요, 수영을 처음 해보는 배우도 있고 물 공포증이 있던 배우도 있는데 물 속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더라고요. 그걸 보니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한 분 한 분 기량을 발휘하는 걸 보며 ‘와’하며 박수를 치다보니 그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요. 완전히 극복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촬영을 하면서는 괜찮았고,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자유로웠습니다.”
‘김혜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팜 파탈’이다. 그는 여전히 <타짜> 때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실제 김혜수는 전혀 팜 파탈이 아니고요. 그렇게까지 잔상이 많이 남는 캐릭터를 했다는 것도 행운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그를 만난 이들은 그를 ‘정이 많은 맏언니’라고 묘사하곤 했다. 이를 두고 그는 “어느 순간부터 다들 저에게 ‘맏언니’라고 하는데, 나이가 들고 경력이 많아지니 후배들이 생겨서 그런 것이다. 솔직히 맏언니 역할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며 “주연으로서의 책임감, 선배로서의 책임감을 다들 말씀하시는데 그런 것까지 할 여력이 없다.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게 제일 중요하다. 거기에 집중하는 게 1번”이라고 말했다. 이어 “저를 좋다고 얘기하는 분들은 서로 좋은 영향을 받고 자극을 받은 분들일 것”이라며 “제가 엄청나게 대단한 박애주의자라 주변 분들을 다 베풀고 챙기겠나. 다 상호간 영향”이라고 했다.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한 김혜수는 데뷔 38년차다. “좋은 배우, 새로운 배우, 제가 갖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는 배우들이 정말 많아요. 오랫동안 배우를 한다는 게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관객이 한 배우의 장단점을 다 아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아끼고 기다려주는 분들이 있다는 게 눈물 날 정도로 감사한 일이에요.”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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