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 내부통제 강화 방안에도…책임 범위 여전히 모호
대표이사 ‘시스템 실패’ 경우에 제재
‘상당한 주의’ 다해야 책임 경감·면제…추상적 표현 보완해야
금융당국이 금융사의 내부통제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선 방안을 발표한 가운데,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의 책임을 경감하거나 면제하는 규정이 모호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스템 실패’로 제한한 대표이사 제재 기준은 물론, 임원들의 관리 의무 위반을 면책해 주는 ‘상당한 주의’라는 표현이 추상적이라 책임 떠넘기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4일 금융업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금융회사 내부통제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방안의 핵심은 책무구조도(Responsibilities Map) 도입이다. 금융사 스스로가 경영진별로 내부 통제의 책임 영역을 사전에 정해놓도록 해서 금융사고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금융사들은 앞으로 CEO와 최고리스크관리책임자(CRO) 등 이른바 ‘C레벨’ 임원을 포함한 임직원에게 내부통제와 관련한 책임 내용을 지정하게 된다.
◇CEO ‘시스템 실패’ 때 제재…'상당한 주의’ 다해야
기존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제24조는 금융회사에 내부통제 기준 마련이라는 형식적인 의무만 부과하고, 실질적 운영 방식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이제껏 크고 작은 금융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현행 규율이 형시적, 절차적 의무로만 인식될 뿐 금융사 임직원의 의식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긴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2018년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에서 판매한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도 관련이 있다. 금융당국은 2019년 DLF 상품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자 자본시장법상 불완전판매 제재와 함께 금융회사 지배구조법상 내부통제 기준 마련 의무 위반을 이유로 당시 은행장에 대한 중징계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손태승 전 우리금융그룹 회장은 지난해 12월 ‘징계 근거가 없다며 이를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해 최종 승소했다. 현행법은 내부통제 기준을 마련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을 뿐 CEO가 내부통제 기준을 준수하지 못하거나 미흡하더라도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취지였다.
이에 금융당국은 금융사 CEO의 내부통제 책임 범위를 명확히 했다. CEO의 경우 전 회사의 내부통제 체계를 구축하고 관리하는 의무를 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조직적 문제, 또는 광범위한 문제 발생 등 내부통제의 시스템적 실패(systemic failure)에 대한 책임만 부담하도록 했다.
상품 설계나 불완전 판매 과정에서 문제가 있을 경우 해당 부문의 임원이 책임을 지되, 시스템 실패에 대해선 대표이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대표이사가 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게 금융위의 입장이다.
그러나 법조계에선 시스템적 실패에 대한 정의와 범위가 모호해 책임 전가 등의 문제가 여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현행법에서는 내부통제 기준 마련 의무만 부과하는 상황이라 개선안이 한발 더 나아간 것은 맞다”면서도 “시스템적 실패라는 규정이 모호해 예측가능성도 떨어지고, 이에 따라 여전히 책임 떠넘기기가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감면 기준에 해당하는 ‘상당한 주의’라는 표현도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번 방안에는 내부통제 관리 조치를 실행하지 않거나, 불충분하게 실행해 관리 의무를 위반할 경우 신분 제재가 부과된다. 다만 상당한 주의를 다해 내부통제 관리 조치를 한 것으로 인정될 경우 책임을 경감하거나 면제한다.
대형로펌의 금융 전문 변호사는 “상당한 주의를 다했는지 여부는 사전적, 객관적으로 예측가능한 정도의 관리 조치를 취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상당한 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느 정도 수준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금융사 입장에서는 판단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법원, 내부통제 실패 경영진 책임 폭넓게 인정
최근 법원은 기업이나 임원들의 경영활동과 관련해 법적 책임을 폭넓게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업 담합 행위에 대표이사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다. 앞서 동국제강은 강판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공정위로부터 320억원의 과징금 부과 처분을 받았고, 소액주주는 장세주 회장이 감시 의무를 위반해 벌어진 일이라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은 “장 회장이 담합 행위에 관여하거나, 위법 행위임을 알면서 감시 의무를 소홀히 한 것으로 볼 만한 증거가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해 “대표이사가 내부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고, 이러한 시스템을 통한 감시·감독 의무 이행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결과 다른 이사 등의 위법한 업무 집행을 방지하지 못했다면 대표이사로서 회사 업무 전반에 대한 감시 의무를 게을리한 것”이라고 판결한 바 있다.
법조계에선 이번 판결의 의미로 ‘입증책임의 전환’을 꼽는다. 기존에는 회사 경영에 참여한 적 없는 주주가 이사들의 감시 의무 위반 사실 자체를 입증해야 했지만, 이제는 ‘회사에 내부 통제 시스템이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만 물어보면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피고가 입증을 해야하는 것이다.
올해는 계열회사 간 부당지원 행위와 관련된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지시·관여 책임에 대해서도 총수의 평소 태도 등 간접사실에 의한 증명까지 폭넓게 인정한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검찰에서도 불기소 처분한 사건을 대법원에서 정반대의 결정으로 뒤집은 주목할 만한 판결이라는 평가다.
금융당국은 이번 개편의 방점이 금융사 임원 제재가 아니라 금융사고 예방에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충실한 관리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면 책임을 경감 혹은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내부통제 관리 의무 위반 여부를 점검해 임원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을 금융위원회 고시로 정해 공개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한 지배구조법 개정안은 올해 안으로, 시행령 등 개정은 내년까지 각각 완료해 2025년부터 은행과 금융지주사에 적용이 가능하도록 추진할 예정이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배터리 열폭주 막을 열쇠, 부부 교수 손에 달렸다
- 中 5세대 스텔스 전투기 공개… 韓 ‘보라매’와 맞붙는다
- “교류 원한다면 수영복 준비”… 미국서 열풍인 사우나 네트워킹
- 우리은행, ‘외부인 허위 서류 제출’로 25억원 규모 금융사고… 올해만 네 번째
- [증시한담] 증권가가 전하는 후일담... “백종원 대표, 그래도 다르긴 합디다”
- ‘혁신 속 혁신’의 저주?… 中 폴더블폰 철수설 나오는 이유는
- [주간코인시황] 美 가상자산 패권 선점… 이더리움 기대되는 이유
- [당신의 생각은] 교통혼잡 1위 롯데월드타워 가는 길 ‘10차로→8차로’ 축소 논란
- 중국이 가져온 1.935㎏ 토양 샘플, 달의 비밀을 밝히다
- “GTX 못지 않은 효과”… 철도개통 수혜보는 구리·남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