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아닌 '사회'에 공헌할 것을 맹세합니까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1.
리영희 선생님은 내 결혼식 주례이셨다. 또 선생님에게는 내가 첫 주례 제자였다. 그렇게 선생님이 내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된 것은 1970년대 유신독재가 낳은 시대의 인연이었다.
1974년 2월, 나는 35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그해 3월, 서울대 미학과 4학년에 복학하였다. 그런데 한 달 만인 4월, 일명 민청학련 사건으로 불리는 긴급조치4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제대 2개월 만에 감옥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비상고등군법회의는 무시무시해서 관련자들은 사형, 무기징역, 징역 20년, 15년 등을 언도받았는데 나는 군 제대 두 달 만에 구속되었다는 사실이 좀 딱해 보였는지 '겨우' 징역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비상고등군법회의 2심에 항소이유서를 써낼 때 나는 딱 한 문장만 썼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징역 10년 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통했는지 7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이에 나는 상고를 해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상고포기를 해버렸다. '까짓 것 7년 살고 말지' 하는 배짱이었다. 그러자 형이 확정되어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되어 출역(出役)하게 되었다. 내가 일하는 공장은 헝겊을 오려 '뻥튀기꽃'(수국꽃)을 만드는 조화(造花)2공장이었다. 여기서 나는 공범인 백영서, 김학민, 최민화 등과 함께 징역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유신독재 정권은 한국의 인권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는 세계 여론에 밀려 1975년 2월 15일. 긴급조치4호 위반자 중 인혁당 관계자와 이현배, 유인태, 이강철, 김효순 등 졸업생 몇 명만 남겨두고 재학생 전부와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 등 재야인사 모두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하였다.
출소해 보니 수감자 중 대법원에 상고한 사람들은 서류가 법원에 갔다 와야 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복잡해 미처 석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인 17일 저녁에 출소한다는 소식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다. 그래서 나는 '공범들'의 석방을 맞이하러 서대문 교도소로 갔다. 그때 나는 감옥 안에서 말로만 듣던 지하철을 처음 타보았던 것이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그날 저녁 일찍부터 현저동 서대문 구치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재야인사들로 가득했다. 나처럼 갓 출소한 '빵잽이'들은 빡빡머리 아니면 모자를 쓰고 있었다. 당시 나는 모자도 쓰지 않고 다녔는데 키가 큰 바람에 나의 빡빡머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구치소 문이 이제나저제나 열리기만 기다리는데 내 곁에 있던 한 중년의 신사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 출소했소?"
"예, 서울 문리대 미학과 학생입니다."
"거, 고생 많았소."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나, 리영희라고 하오."
"예에? 선생님! 반갑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세 번 읽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1974년 6월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책을 받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도서 열독이 허가된 그해 11월이었다. 여동생이 황석영의 <객지>와 함께 보내주었는데 <객지>는 감방 잡범들이 돌려보느라 표지가 다 떨어질 정도였지만 <전환시대의 논리>는 내 손에서 한 달간 떠나지 않았다.
사실 내가 리영희 선생을 글로 처음 만난 것은 군에 있을 때인 1972년 여름, <창작과비평>에 실린 <베트남전쟁(I)>이었다. 이 글은 내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준 잊을 수 없는 글로 되었다. 지금은 그 내용을 다 잊어버렸지만 내 눈에 씌워 있던 모든 편견의 장막을 걷어버렸다는 통쾌감만은 가슴에 깊이 박혀 있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은 나의 어느 선생님보다도 내 마음속의 은사로 되어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 읽은 <전환시대의 논리>는 다시 내게 사물을 바라보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같은 조화공장에 일하던 백영서와 이 책에 대해 참으로 많은 감동을 나누었다. 교도소에서의 독서가 얼마나 진지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이 책에 대해 홋날 다른 후배들이 갖던 의미보다 더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리영희 선생님께 한번 찾아뵙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아무 때나 놀러 오라고 하시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일주일쯤 뒤 나는 백영서와 함께 제기동 한옥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시며 안방을 향해 사모님께 큰 소리로 외치셨다.
"여보, 여기 이번에 고생하고 나온 분들 오셨으니 어서 술상을 내오시오."
사모님이 차려오신 술상 앞에서 우리는 선생님의 따뜻한 위로와 진지한 인생 사회 철학을 들었다.
2.
이렇게 나는 감옥생활 11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내 처지란 대학 졸업은 못하였고 형집행정지로 요시찰의 대상이 되어 매달 동향보고를 쓰는 담당형사를 만나는 상태라 무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부모님 뵐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백기완 선생의 주선으로 강민 시인이 편집국장으로 있는 금성출판사에 취직하여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구속됐을 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50일 동안 구류를 살았던 사랑하는 애인과 결혼하여 오붓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의 허락을 얻은 나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주례 선생으로 장준하 선생을 모실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면목동 장준하 선생 댁에 자주 드나들어 장남인 장호권 형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런데 그해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로 돌아가셨다.
결혼 날짜가 다가오는 나로서는 난감했다. 그래도 나는 주례 선생님만은 인생의 사표로 삼을 분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오른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을 살았다는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선생님과는 한 번 찾아뵈었다는 인연밖에 없으며 또 선생님은 당시 47세로 나이가 젊어서 거절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용기 내어 제기동으로 찾아뵙고 주례를 부탁드렸더니 뜻밖에 흔쾌히 승낙하시며 안방을 향해 사모님을 불렀다.
"여보, 유군이 결혼을 한다는구려. 술상 좀 내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항상 술상을 내올 명분을 그렇게 강조하시곤 한 것이었다. 사모님은 그놈의 술 좀 작작 마시길 바랐고, 선생님은 항시 구실을 찾곤 했던 것이다. 사모님께서는 술상을 내오며 내게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잊지 않으시면서 술상의 안주 그릇을 가지런히 놓으며 지나가는 얘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엊그제만 해도 새장가 갈 판에 무슨 주례냐고 거절하시더니 어떻게 마음을 바꿔 잡수셨수?"
"그때는 그랬었지."
나는 그제야 선생님의 첫 주례가 나인 줄 알았다. 며칠 후 나는 내 처 될 사람과 함께 주례 선생님 댁에 인사드리러 갔다. 당시 관례에 따라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사 갔는데 사모님께서는 선생님 목과 팔 사이즈를 꼭 맞추었다며 역시 미학과 출신답다고 칭찬해주셨다. 그때 다른 한 쌍의 젊은이가 찾아와 우리는 이내 자리를 비켜주고 일어났는데 그는 바로 선생님의 글 <농사꾼 임군에게 보내는 편지>의 '임군'으로 나보다 일주일 뒤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인사온 것이라고 했다.
3.
1975년 9월 27일 12시, 나는 리영희 선생님을 주례로 모시고 서울 퇴계로2가에 있던 결혼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의 결혼식장은 예기치 못하게 만원을 이루었다. 당시 민청학련 관련 공범들은 출소 후 당국의 감시로 친구들끼리 만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는데 이날 내 결혼식장이 '합법적인 만남'의 장소로 된 것이다. 식장 안팎이 대단히 소란했다. 민청학련 출소자들은 요시찰로 동향보고를 계속하는 바람에 형사들도 적지 아니 왔고 내 담당형사도 축의금으로 3000원을 내놓은 것이 장부에 적혀 있다. 하객 중에는 황석영 형, 최민 형 등 선배들이 축하해주러 왔고 그런가 하면 재야인사 중 소설가 이호철 선생, 동아투위의 박지동 선배 등도 축의금을 내고 갔다.
그런 중 내 결혼식을 더욱 큰 이벤트로 만든 것은 주례가 다름 아닌 리영희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담당형사는 왜 한양대 교수가 주례를 맡게 됐냐고 의아해했지만 나의 친구들은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글로만 뵙던 리영희 선생님의 얼굴을 뵐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자가 식이 열림을 알리면서 "리영희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라는 말을 하자 하객 한쪽에서 "뭐, 뭐, 뭐라고?"하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결혼 청첩장에는 신랑, 신부의 부모 이름과 함께 대개는 주례의 이름도 쓰여 있었다. 그러나 민청학련 '공범'들에겐 청첩장이 아니라 장소와 시각만 입으로만 전했기 때문에 주례가 리영희 선생인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개를 내밀며 선생님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 사람, 밖에서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주례 선생님을 보겠다고 뛰어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신랑이 입장하여 그 큰 키로 주례를 가려버리니 그때는 이미 늦어 얼굴을 못 봤다고 나중에 말한 친구도 있었다.
선생님의 주례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것이었다. 당시는 비디오라는 것이 없어 남은 흔적이 없고 내 기억 속에만 있는데 내게는 잊히지 않는 두 마디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히 들려온다.
"인생을 뜻있고 선이 굵게 사는 사람은 자잘한 것에는 잔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하고 섬세한 사람이 선이 굵고 멀리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신랑, 신부는 시간을 지킨다는 작은 일부터 소홀히 하지 말고 먼 곳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살다보면 의사결정에서 의견이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여자 쪽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 일에서 의견차가 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 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나는 이 충고를 항시 잊지 않았다. 내 인생에는 두어 번 큰 갈림길 같은 것이 있었을 때 나는 내 처에게 판단해줄 것을 물었고 그때마다 그녀의 판단에 따랐다. 한 번은 내가 <계간 미술>을 떠나 어느 대학 교수로 발령받고 신원조회에 걸려 하루 만에 취소되었을 때다. <계간 미술>로 바로 복귀할 수도 있었고, 또 그곳은 내게 3개월간 월급을 주며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미술평론가로 살려면 백수가 될지언정 그곳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정된 직장과 불안정한 프리랜서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에서 나는 주례 선생님의 충고대로 내 처의 판단에 맡겼다. 내 처는 "직장에서 나와도 당신은 나를 굶기진 않을 것 같다"며 내 길을 가게 해주었다. 사실 그때 아내가 막는다고 내가 직장으로 돌아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례 선생의 충고에 따랐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그로 인한 마찰도 없었고 아내는 나의 어려운 처지를 항시 이해해줄 수 있었던, 일종의 삶의 슬기로운 형식 하나를 갖춘 셈이었다.
나의 결혼식에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기념품이 있었다. 그것은 '혼인서약'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성혼선언문' 이외에 '혼인서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일종의 맹세로, 군인의 맹세, 혁명공약, 국민교육현장 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형식적인 서약인데 그 문장은 어디나 똑같다.
신랑 유홍준 군과 신부 최영희 양은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과 어른을 공경하고 나라에 공헌할 것을 맹서합니까?
기쁠 희(囍)자를 윗단 가운데 두고 봉황새가 좌우로 장식되어 있고 아랫단에 무궁화꽃이 무늬로 그려 있는 이 혼인서약서는 두꺼운 판에 파란 우단으로 덮여 성스럽게 신랑, 신부에게 전달하게 되어 있다. 물론 거기에는 '1975년 9월 27일 주례 리영희'라는 사인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이 '혼인서약'을 펼쳐보니 주례 리영희 선생은 혼인서약 문장 중 '나라'라는 단어를 두 줄로 긋고 '사회'라고 교정보아 놓았다. 만년필로 '사회'라고 고쳐 쓴 것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제기동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면서 '혼인서약서'에 단어 고친 것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그거일 수 있으나, '나라'라는 말에는 파쇼 냄새가 나지만 '사회'라는 말에는 인간의 윤리가 살아 있다는 차이 아니겠어."
아! 나는 이런 분의 주례로 결혼했다. 이것이 나의 복인가, 아니면 내 생의 부담인가. 그것을 나는 아직도 분명히 가늠치 못한다. 다만 주례 선생님께 변함없는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살아왔다.
4.
리영희 선생님은 내 결혼식 이후 '빵잽이들', 제적학생들 주례를 도맡으셨다. 서중석(성균관대 명예교수), 유인태(전 국회의원), 채만수(진보운동 이론가), 김세균(서울대 명예교수), 윤후상(<한겨레> 편집국장), 유인택(공연기획가), 백영서(연세대 명예교수) 등 이 리영희 선생님의 '주례 제자들'이다.
그리하여 선생님 살아생전엔 우리 주례 제자단은 해마다 설날이면 세배를 다녔다. 일년에 한번은 날을 받아 선생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저녁을 하며 그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였다. 멋진 한정식집으로도 모셨고, 소래포구로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참관인으로 선생님의 벗인 임재경 선생님이 함께 하셨다. 선생님이 <8억인과의 대화>를 펴내실 때는 댁으로 찾아가 교정보는 일도 도와드렸다. 선생님 회갑연이 프레스센터에서 열릴 때는 식장 앞에서 주례제자단이 접수를 맡았었다. 선생님이 교도소에 무시로 끌려가 안 계실 때도 사모님을 뵈러 다니곤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당신의 주례 제자들이 국회의원도 되고, 대학교수도 되고, 문화재청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흐뭇해하셨다. 내가 문화재청장으로 경복궁 경회루 개방에 이어 창덕궁 후원과 희정당, 대조전도 개방할 때 선생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시범답사를 했는데 그렇게 즐거워하셨다.
사모님인 윤영자 여사님도 우리 주례제자단을 기특해하셨다. 사모님은 주례제자 중에서 특히 나를 귀여워하셔서 우리들이 찾아가면 나를 '반장'이라고 하시며 우리 어머니 안부를 따로 묻곤 하셨다. 민주화운동 가족모임으로 '한결모임'이 있는데 공덕귀 여사, 김지하 시인 어머니, 이철 의원 어머니 등등 모두 돌아가시고 지금은 이해동 목사님 부부와 우리 어머니만 아직 생존해 계셔서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함께 버텨온 정이 각별하게 깊이 든 것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나는 사모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일본 교토 답사에도 모시고 갔고 부여문화원에서 열린 내 행사 때도 모시고 갔었다. 그리고 내가 부여에 시골집을 짓고 주말을 거기서 보내면서 해마다 가을이면 우리 집 앞산에서 수확한 부여 알밤을 택배로 보내드리는데 사모님께서는 꼭 김치냉장고에 보관했다가 12월 5일 선생님 제삿날 제상에 올려놓고 "이거 당신 주례제자 유홍준이가 보내준 겁니다"라고 고하신다고 한다.
선생님의 아들 딸, 건일이, 건석이, 미정이도 이런 나를 가까운 친척붙이로 생각하여 미정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러면 사모님은 "너는 교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꼭 아저씨라고 하냐"고 퉁박을 놓지만 나는 그게 얼마나 정겹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유신독재라는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은 이 얼마나 기쁘고, 흐뭇하고, 행복한 인연의 이야기인가. 아! 나의 주례 리영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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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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