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처음으로 맡은 악역…10㎏ 찌우고 고향 아저씨처럼"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조금 놀랐어요. 제가 이런 역을 해본 적이 없는데…대체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이 역할을 덜컥 맡기신 걸까? 생각했죠."
2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영화 '밀수' 주연 배우 박정민은 류승완 감독에게서 출연 제안을 받은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밀수 범죄에 뛰어든 해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깡패 '장도리'를 연기했다. 자신을 돌봐주던 해녀 진숙(염정아 분)을 배신한 대가로 바닷가 도시 군천의 밀수 판을 꽉 잡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겁 많고 속 좁은 타고난 성정은 바뀌지 않는 법. 전국구 '밀수 오야붕'이라 불리는 권 상사(조인성) 앞에선 꼬리를 내리고, 의리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뒤통수를 치기 일쑤다. 분명 악독한 인물이지만 카리스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과 툭툭 내뱉는 유머러스한 대사로 웃음을 준다.
박정민은 "장도리는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말했다.
"'밀수'에 나오는 사람 중 류 감독님의 '말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캐릭터라고도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명확하게 지시한 게, 어릴 적 본인 고향에 있던 아저씨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거였거든요. 뇌를 거치지 않고 심장에서 나오는 말을 그냥 하는…하하."
그는 장도리 역을 소화하기 위해 외모도 파격적으로 변신했다. 10㎏ 이상을 증량해 체중을 80㎏으로 만들었고 머리는 브로콜리가 떠오를 만큼 빠글빠글하게 말았다.
"변한 제 모습을 보고 되게 신났어요. 가면을 하나 쓴 거 같은 느낌이랄까요? 평소 제 얼굴이 아니니까, 극 중에서 무슨 행동을 해도 납득이 가더라고요. 연기의 허용 범위를 넓혀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김종수 등 쟁쟁한 선배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탓에 긴장감도 컸다고 한다. 촬영 초반부에는 연기에 갈피를 잡지 못하기도 했다고 그는 털어놨다.
"워낙 아우라와 에너지가 큰 선배님들이시잖아요. 제가 그걸 반감시키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연기를 못하거나 그쪽의 연기를 받아치지 못해서 쩔쩔매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고요. 특히 춘자(김혜수), 진숙, 권 상사와 나이트클럽에서 대면하는 장면에서 선배들 눈빛이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이 사이를 제가 휘저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처음엔 헤매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의 우려와는 달리 김혜수는 "앞으로 장도리보다 더 잘한 역할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박정민의 연기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박정민은 "감개무량하고 감사하다"면서도 평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칭찬을 들으면 민망하고 도망가고 싶다"며 웃었다.
찰떡같이 장도리 역을 소화했지만, 실은 자신이 맡을 역할이 무언지도 모른 채 캐스팅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읽기는커녕 작품 설명도 제대로 듣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날 감독님이 전화가 와서 '밀수하는 이야긴데 한번 해볼래?' 물으셨어요. 저는 그냥 바로 결정했어요. 류승완 감독님 영화라면 뭐라도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원래도 감독님의 팬이긴 했지만, 단편 '유령'(2014)을 찍고부터 더 팬이 됐거든요."
박정민은 영화인을 꿈꾸던 고교 시절 류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류 감독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꼭 극장을 찾아 관람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볼 정도였다.
그는 류 감독 외에도 이준익, 박찬욱, 한재림, 우민호, 신연식, 윤성현 등 충무로 대표 감독들과 여러 차례 호흡을 맞췄다. 독립운동가부터 트랜스젠더, 반항기 가득한 소년, 천재적 두뇌를 가진 자폐인까지 역할도 다양하고, 조·단역도 가리지 않았다.
박정민은 "감독님들이 시키는 걸 잘해서 찾아주시지 않나 생각한다"며 몸을 낮췄다.
"수동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제가 단편 '언프레임드'를 연출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배우가 놀라운 지점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데 감독이 원하는 걸 배우가 정확하게 해줄 때 쾌감이 있다는 것을요. 감독의 지시를 정확하게 받아먹는 배우라고 말해준다면 제게는 매우 훌륭한 칭찬이지 않나 싶습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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