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이 공공연한 시대에 신혜선의 망각 엔딩이 의미하는 것('이생잘')
[엔터미디어=정덕현] "안 궁금해요? 누가 왜 찔렀는지?" 첫 번째 생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해낸 반지음(신혜선)이 애틋함과 미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문서하(안보현)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 첫 번째 생에 반지음은 복수하려던 자신을 막아선 문서하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하지만 문서하는 그런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얼굴로 단언했다. "전혀."
이 짧은 장면은 tvN 토일드라마 <이번 생도 잘 부탁해>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불가에서 윤회를 이야기할 때 다시 태어난 자가 전생을 기억 못하게 되는 건 '망각'이 주는 축복이 아닌가. 그건 전생의 기억 때문에 이생을 망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 문서하의 단호한 "전혀"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결자해지'. <이번 생도 잘 부탁해>는 마지막회의 부제처럼 '결자해지(結者解之) 엔딩으로 마무리됐다. 반지음(신혜선)이 전생을 기억하게 된 건 천 년 전 언니와 자신을 죽게 만든 민기(이채민)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이 원통함을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이다. 백년이고 천년이고 다시 태어나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따라서 그 저주를 건 건 타인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였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지음은 민기를 찾아가 그를 용서했다. "악연이 당신이 아니라 서하였대도 전 상관없어요. 기억은 괴롭겠지만 천 년 전 과거는 힘이 없으니까." 천 년 동안 전생을 기억하면서 살아온 반지음이 그 여러 차례 반복된 삶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이것이었다. '과거는 힘이 없다.'
민기는 반지음에게 그 전생을 기억하는 저주를 끝낼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했다. 그건 '모든 걸 잊을 수 있는 가벼운 마음 그리고 네 글자.' 그것이 그 방법이었다. 반지음은 전생에 있었던 소중한 인연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안녕'하고 말했다. 그건 그들과 이별하는 것이면서 인사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꺼내놓은 마지막 한 마디는 "이제 됐어"였다.
판타지로 그려진 장면이지만, 이건 다분히 불교적 세계관이 말하는 '해탈'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나 온전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름 아닌 기억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지음은 망각을 맞았고, 그 대가로 소중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문서하가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소중한 사람들이 반지음을 찾아왔다. 물론 이미 엮어진 인연이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이번 생도 잘 부탁해>는 전생을 기억하는 인물이라는 판타지 설정을 통해 욕망과 기억 그리고 사랑과 삶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은 작품이었다. 물론 반지음과 문서하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가 그 중심이었지만, 그 주변인물들과의 신비롭기까지한 관계들은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관계들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저 우연히 만나 함께 살아가는 관계들이 억겁의 시간의 무게감을 갖고 있다고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었다.
천 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삶이 무료했지만 서하를 만나 행복해지고 싶어하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가는 반지음 역할의 신혜선은 이번 작품에서도 이 쉽지 않은 인물을 자기 색깔로 연기했다. 그의 상대역으로 그간의 역할들과 사뭇 다른 멜로의 결을 연기에 녹여낸 안보현도 빼놓을 수 없고, 윤초원과 하도윤이 보여주는 사랑 이야기를 예쁘게 풀어낸 하윤경, 안동구나 김애경이라는 이 작품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소화해낸 차청화의 연기도 박수 받을 만 했다.
또한 <이번 생도 잘 부탁해>는 무엇보다 아역들의 연기가 놀라운 작품이기도 했다. 김시아, 박소이, 정현준은 물론이고 기소유까지 이들이 보여준 웃음과 눈물은 이 낯선 판타지에 시청자들이 깊게 몰입하게 해준 힘이 아닐 수 없었다. 또 이들의 연기와 쉽지 않은 대본을 쉽게 풀어내고 아름답게 그려낸 이나정 감독의 연출 역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결자해지'라는 부제에 걸맞게 저주를 갖게 된 그 장소에서 저주를 푸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그려낸 이 작품은 '이생망' 시대에 '현재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이번 생은 망했다며 내생을 기대하는 자조적인 그 정서 속에서, 이 작품은 그럼에도 '이번 생'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힘겨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당신 앞의 인연들이 있어 버텨낼 수 있다고.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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