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아직도 총알 박혀있어… 북한이 침공땐 또다시 총 들겠다”

민병기 기자 2023. 7. 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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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대한 노병들의 기억은 또렷했다.

6·25전쟁의 최후의 전투, 1953년 6∼7월 두 달 새 중공군 12개 사단과 한국군 4개 사단이 맞붙었던 금성지구 전투에 나섰던 류재식(91) 참전용사는 2021년 금성지구 전투를 다룬 중국의 프로파간다 영화 '금강천'(한국명 '1953 금성 대전투')의 국내 상영을 몸으로 막기도 했다.

6·25전쟁이 삶에서 기억되고 후손들의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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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 70년 미래 70년 - (2) 노병 3인의 자부심·아쉬움
고융희 “적군 기습에 친구 잃어
눈만 껌뻑이며 죽어가던 모습”
류재식 “중국 영화, 금성전투 왜곡
제대로 다룬 한국영화 나오길”
김영환 “삶에서 6·25 기억되고
후손들 일상에 스며들었으면”
여전히 늠름한 용사들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전우’들에게 참배를 마친 뒤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6·25전쟁의 의미를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왼쪽부터 고융희(88), 류재식(91), 김영환(90) 참전용사. 윤성호 기자

6·25전쟁에 대한 노병들의 기억은 또렷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후 70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한 한국에 대한 자부심도 가득했다. ‘내 손으로 지킨 나라’의 뿌듯함 속에는 갈수록 퇴색돼 가는 6·25전쟁의 의미,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아쉬움도 짙게 묻어 있었다.

미국 극동군 사령부가 운영한 한국인 특수부대인 켈로(KLO)부대 출신 고융희(88) 참전용사는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이뤄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쟁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개풍군 전투다. 개풍군이 개성인데, 103고지라고 백마산 바로 옆이다. 1951년 5월인가, 새벽에 자고 있는데 중공군이 기습을 했어. 1개 소대 30명쯤이 있었는데, 정신없이 총을 쏘며 가까스로 뚫고 나오니 다 죽고 7∼8명 살았나. 그렇게 살아남았어. 그때 내 친구 이영찬도 죽었어. 우측 어깨에 총을 맞았는데 피가 워낙 많이 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눈만 껌뻑하고 죽어가는데,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덮어줬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해뒀지만 다시 친구의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었어.”

6·25 참전 유공자 중앙회 임원이기도 한 고 용사는 “6·25 참전 유공자 중앙회 위치가 서울 외곽이라 90살 전후인 용사들이 전국에서 모이기도 힘들다.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쉽게 올 수 있도록, 용산 전쟁기념관이나 시내에 우리 공간이 작게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6·25전쟁의 최후의 전투, 1953년 6∼7월 두 달 새 중공군 12개 사단과 한국군 4개 사단이 맞붙었던 금성지구 전투에 나섰던 류재식(91) 참전용사는 2021년 금성지구 전투를 다룬 중국의 프로파간다 영화 ‘금강천’(한국명 ‘1953 금성 대전투’)의 국내 상영을 몸으로 막기도 했다.

그는 “금성지구 전투는 절대 우리가 진 전투가 아니다. 무려 12개 사단과 맞붙어 끝내 금성지구 탈환에 성공한 전투다. 이런 걸 중국이 자기들이 이긴 것처럼 ‘항미원조’라고 하며 영화로 만드는 게 너무 화가 난다. 우리가 훨씬 더 잘 만들면 얼마나 좋은가. 금성지구 전투를 제대로 다룬 영화 하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이끌던 중대원 170명 중엔 단 7명만 살아남았다. 그는 “우리나라 땅 어디를 밟아도 전쟁터가 아니었던 곳이 없어. 우리 발밑에 참전용사들이 묻혀 있어. 잔혹한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가슴에 평생 남아 있는 총탄은 육박전 중 박혔다. 군의관이 후송 중 죽을 수도 있으니 편히 가라며 모르핀을 놔줬다. 그러고도 살아남은 그는 이후 월남전까지 참전했다.

18살 나이에 1·4후퇴 당시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와 그 길로 입대한 김영환(90) 참전용사까지, 정전 70주년을 맞은 노병들의 소원은 거창하지 않았다. 잊히지 않는 것. 6·25전쟁이 삶에서 기억되고 후손들의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 “학생들을 보면 부러워. 우린 정말 못살고 어려웠는데. 우리를 우러러봐 달라는 게 아니라, 6·25전쟁을 기억하면 좋겠어. 그리고 남아 있는 용사들에 대한 예우가 좀 제대로 되면 좋겠어.” 고 용사는 ‘즐거운 보훈’ ‘일상 속의 보훈’을 위해 지난 6월 30일 제복을 입고 현충원에서 열린 제복·한복 패션쇼 ‘자락을 펴다’에 참여, 런웨이에 서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노병들은 밝게 웃으며 ‘먼저 간 동료’들을 향해 ‘또 오겠다’고 인사하고 현충원을 떠났다. 정전 70년, 노병은 여전히 씩씩했다.

민병기·서종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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