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70년… “후손들 혜택 볼 것” 이승만 예측 실현

조재연 기자 2023. 7. 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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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후손들이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최종안이 서울에서 가조인된 뒤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한반도가 해양과 대륙의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한반도 교두보론'을 내세워 미국을 설득한 끝에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국 워싱턴DC에서 조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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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 진화
“열강 위협 속 번영 발판” 평가

“우리의 후손들이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최종안이 서울에서 가조인된 뒤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1953년 체결돼 올해 70주년을 맞는 한·미 동맹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자유와 번영을 안겨준 ‘기적의 동맹’으로 평가받는다. 냉전의 전개와 종식, 동아시아 정세의 급변 속에서 굴곡을 겪어오기도 했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국 간 동맹의 신뢰는 한층 깊어졌다.

한·미 동맹의 태동에는 이 전 대통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통일 없는 휴전에 반대했던 이 전 대통령은 미국에 휴전 이후에도 한국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방위조약 체결을 강하게 요구했다. 한반도가 해양과 대륙의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한반도 교두보론’을 내세워 미국을 설득한 끝에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국 워싱턴DC에서 조인됐다.

한·미 동맹은 여러 차례 위기도 겪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의 손으로’란 구호를 내걸고 베트남 철군과 주한미군 부분 철수를 병행했고, 선거 공약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웠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한국 정부와 마찰을 빚으며 철군을 추진했다. 국내에선 1980년대 운동권을 중심으로 ‘양키 고 홈’이란 구호가 나오는 반미(反美)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함께 한·미 동맹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성숙한 동맹으로 재정립됐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의 하나도 한·미 동맹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국내총생산(GDP) 대비 6% 미만, 1990년대 중반부터는 3% 미만의 국방비를 쓰며 안보를 지켜왔다. 반면 북한은 GDP의 20∼30%를 군사력에 소진하며 경제발전 기회를 놓쳤다.

양일국 한국외대 객원교수는 “지난 70여 년간 북한·중국·러시아와 인접한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은 사실상 한·미 동맹을 디딤돌로 삼아 이룬 성과”라고 강조했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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