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우대권 없는 골프'의 위대함…김주형의 디오픈 공동 2위
[골프한국] 토너먼트 형식의 스포츠 종목에선 대부분 시드(Seed) 제도가 적용되고 있다. 처음부터 강한 선수나 팀끼리 맞붙지 않도록 대진표를 짜기 위해 내부적으로 합의한 순위나 순번을 할당하는 제도다. 초반에 강한 선수나 팀끼리 대결해 그중 한 선수나 팀이 탈락하면서 대회의 흥행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대회 후반에 강자들이 살아남아 진정한 승자를 가려야 스포츠팬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골프에는 시드 제도를 적용하지 않는다. 국가 간이나 대륙 간 대항전 등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시드의 취지를 부분적으로 살리는 정도다. 모든 선수가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세계랭킹과 지명도가 높은 선수라고 해도 특별대우를 받지 않는다. 오픈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나 일반 대회에서도 월요예선을 거쳐 출전선수를 선발하는 것도 가능한 한 많은 선수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에서다.
골프가 공정하고 평등한 경기로 인정받는 것은 특정 선수에 대한 우대권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골프의 위대성에 큰 몫을 차지한다.
24일(한국시간) 영국 잉글랜드 위럴의 로열 리버풀GC(파71·7383야드)에서 막을 내린 시즌 마지막 메이저 제151회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미국의 브라이언 하먼(36)이 최종합계 13언더파 271타로 공동 2위군에 6타 차이로 은제 클라레 저그를 품었다.
대회 전 아무도 하먼을 우승후보로 거론하지 않았다. 170cm의 단신에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도 293.7야드로 PGA투어 114위에 머물고 있다. 2009년 프로로 전향한 뒤 통산 2승에 머물고 있어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1라운드를 공동선두 토미 플리트우드, 에밀리아노 그릴로(5언더파)에 1타 뒤진 3위로 마친 그는 2라운드에서 6타를 줄이며 단독선두로 나서 마지막 라운드까지 6타 차이의 간격을 유지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항아리벙커와 깊은 러프가 입을 벌리고 있는 로열 리버풀GC에 흔들림 없이 대응하는 그는 진정한 '작은 거인(Little Big Man)'이었다. 일상생활에선 오른손잡이이면서 유독 골프만 외손잡이로 치는 그는 톱랭커들이 허우적대는 사이 순례길에 오른 성자(聖者)처럼 묵묵히 자신의 골프를 펼쳐나갔다. 은근히 로리 맥길로이나 셰인 로리 등의 우승을 기대하는 현지의 갤러리들은 노골적으로 하먼에게 비속어를 쏟아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더스틴 존슨, 저스틴 토마스, 필 미켈슨, 샬 스워첼, 러셀 헨리, 저스틴 로즈, 콜린 모리카와 등 PGA투어의 강자들이 컷의 벽을 넘지 못하고 컷을 간신히 통과한 브룩스 켑카, 브라이슨 디섐보, 잭 존슨 등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로열 리버풀코스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모든 것이 골프의 위대성을 증명하기 위해 연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가선수들의 명성이나 기량 등을 무시하고 완전히 셔플한 뒤 제로 베이스에서 경기를 벌이는 골프의 본래 모습이 로열 리버풀에서 재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갖 자연조건 속에서 골퍼를 시험하는 무대가 이곳처럼 적절한 곳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스코틀랜드가 골프의 발상지라는 것은 골퍼들에게 더 없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김주형(21)이 공동 2위에 올라 한국인 디 오픈 최고 성적을 낸 것도 제로 베이스에서 모두가 동등하게 시작한다는 골프의 특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직전 주 열린 제네시스 스코티시 오픈에서 공동 6위에 오른 김주형은 1라운드를 마친 뒤 숙소에서 미끄러져 발목이 붓고 멍이 드는 부상을 당했으나 고통을 참고 출전을 감행, 제이슨 데이(호주), 제프 슈트라카(오스트리아), 존 람(스페인) 등과 공동 2위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한국 선수가 메이저대회에서 2위 이상 성적을 거둔 것은 2009년 PGA 챔피언십 양용은(우승), 2020년 마스터스 임성재(공동 2위) 이후 3번째다. 디 오픈에선 2007년 최경주가 공동 8위에 오른 것이 최고 성적이다.
최종 라운드 1, 2홀을 연속 보기로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5번 홀 이글과 3개의 버디로 4라운드 최저타 타이를 이룬 김주형에게서 대선수의 분위기가 물씬 했다. PGA투어 등장 2년 만에 범 무서운지 모르는 하룻강아지에서 정글을 위협하는 맹수로 자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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