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감정을 존중한다는 것
시간이 되었다고 손으로 손목을 가리켰다. 손목시계도 안 하고 있으면서. 아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내려놓았다. 대신 수학 문제집을 집어 들었다. 5분이 지났을까. 무언가를 공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찍찍 긋는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찢는 소리도 났고 "짜증 난다"는 말도 들렸다.
"아, 짜증 나." 뭐가 짜증이 난다는 걸까. 공부하기가 싫은 걸까. 싫겠지. 그래도 6학년, 하기 싫은 공부도 해야 한다는 정도는 아는 나이다. 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하기 싫으니 짜증이 난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막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는데 너무 이르지 않나?
침대에서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어릴 때 했던 행동이다. 기분 나쁜 상황을 어쩌지 못할 때 습관적으로 나오는 몸의 반응. 그러고 나면 아이는 좀 기분이 풀린다고 하는데, 감정을 그런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나는 영 불만이었다. 방으로 가 "왜 그러냐"라고 물으니, "짜증이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학 문제집이 풀기 싫어서 그런 거냐?" 아이는 "아니"라고 한다. "그럼?" "모른다"라고 말한다.
"아하, 그렇다면 그분이 오신 거구나. 호르몬님."
청소년기 호르몬님이 또 열세 살 어린이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구나, 생각했다. 이럴 때는 나도 방법을 모르겠다. 나에게 어떤 해결 방법을 기대하는 걸까? 아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고요하게 두고 보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을 다물고 만다. 호르몬이 날뛰는데 고요한 마음을 찾는 건 어른도 하기 어려운 행동이지 않나 싶어서.
아이의 행동을 두고 볼 수밖에 없다. 공격적으로 굴던 아이는 이내 조용해졌다. 방에서 무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때 남편이 운동을 나가겠다고 한다. 들어올 때 아이가 먹을 쭈쭈바 하나를 사오라고 말한다. 그제야 아이는 작게 말한다. "쭈쭈바 말고 망고 아이스크림". 다행히 그분이 금세 있다 가셨나 보다. 1시간을 알리는 타이머가 끝나자 아이가 문제집을 들고 왔다. "그래도 꽤 많이 풀었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아이에게 그분이 가신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너와의 상황을 방금 글로 써 봤어. 한번 들어볼래?"
이 글을 그대로 읽어줬다. 흥미로운지 재밌게 듣다가도 "5분이 아니라 15분"이라고 내용을 정정했다. 그리고 서운하다는 듯, 억울하다는 듯 "엄마가 장난스럽게 그분이 오셨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싫었어. 내가 짜증이 난 상황을 장난스럽게, 가볍게 취급하는 게 더 기분이 더 나빴어"라고 말했다. 자신이 그럴 때는 그냥 두는 게 더 낫다면서. 나도 내 생각을 말했다.
"엄마는 오히려 진지한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넘기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다음에 이런 상황이 다시 오면 그때는 참고할게."
뭐지? 작년만 해도 이런 반응이 아니었다. 짜증을 낼 때 엄마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하다고 했던 아이였다. 뭔가 해결해주려고 하기보다 내 마음을 그냥 알아주면 괜찮다고 해서 '그분이 오신 거구나'라고 말한 거였는데 달라졌다. 이제는 마음이 아니라 존중을 원하는구나. 내 마음이 이렇다는 걸 알아주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정을 존중해 주길 원하는구나. 아이가 그새 또 자랐구나. 성장했구나. 내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구나. 커다래진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에서 읽은 문장이 떠올렸다.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에겐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호기심과 존중'.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나와 다른 문화의 아이들, 나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아이들을 대할 때도 '호기심과 존중'의 자세가 필요하겠구나 하고.
존중하려면 내가 견뎌야 하는 거구나.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구나. 내가 기다려주면 되는 거구나.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더 짜증을 부르는 것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쓰면서도 궁금하다. 마음을 알아주는 것과 존중은 다른 걸까.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짜증이란 감정을 존중했으면 모른 척 하고 견뎠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다음엔 그 순간을 기록해 봐야겠다. 그때 다시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거냐고 하면 어쩌지? 부모가 되는 일은 어째서 이렇게 쉬운 게 하나도 없는 건지.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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