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무, 더숲, 라이카…관객 마음 얻는 예술영화관 ‘기획의 힘’
오랫동안 영화 상영을 제한했던 코로나 유행은 끝났지만 극장가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팬데믹 때 끊긴 관객 발길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탓이다. 극장업계는 <범죄도시3> 등 일부 흥행작 덕에 최근 멀티플렉스 관객수는 코로나 이전의 80% 정도까지 회복된 반면 예술영화관은 여전히 반토막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극장 관람문화 전반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소리 없이 관객을 늘리는 극장들도 있다. 서울 광화문 역사박물관 옆에 위치한 에무시네마가 대표적이다. 올 상반기 에무시네마를 찾은 관객수는 코로나가 발생 직전 극장이 최고 호황이었던 2019년 전체 관객수를 넘어섰다. 15세기 네덜란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딴 ‘에무’는 광화문역에서도 20분 넘게 걸어야 하는 위치임에도 20대 힙스터 핫플레이스로 자리잡았다. 쇼츠 영상에 익숙한 20대들이 극장에 발을 끊는 관객군으로 여겨지지만 에무시네마 관객의 절반 이상이 20대고 전체 관객의 75%가 35살 미만이다.
지난 17일 저녁 에무시네마에서 <시네마천국>을 보고 나온 한 젊은 관객은 “친구와 <엔니오:더 마에스트로>를 보고 좋아서 <시네마 천국>도 보러왔는데 이 영화를 더 재밌게 봤다”고 말했다. 에무시네마의 성공비결 중 하나는 이 같은 순발력 있는 기획이다. <시네마천국>은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만든 대표작 중 하나다. 지난해에도 폴 토마스 앤더슨의 <리코리쉬 피자>를 개봉하면서 <펀치 드렁크 러브>를 감독전 형식으로 재개봉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에무시네마의 양인모 프로그래머는 “다른 극장에서도 상영하는 개봉작 홍보는 차별성을 갖기 힘들다. 반면 개봉작의 감독이나 배우, 주제나 소재 등을 엮어 관련 기획전을 하면 훨씬 더 잘된다. 오래 전 개봉작이라도 20대 관객에게는 최신작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영화다. 차별성있는 기획이 예술영화관에 가장 중요한 생존방식”이라고 말했다. 2021년 1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개관한 라이카시네마도 20대 관객에게 사랑받는 예술영화관으로 자리잡았다.
에무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감독 크리스탄 페촐트의 <트랜짓>을 2020년 개봉했는데 당시 수입사 대표와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요청했던 같은 감독 전작 <피닉스> 개봉과 감독전을 추진하면서 이듬해 젊은 예술영화팬들 사이에 페촐트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7호선 노원역 앞에 위치한 더숲아트시네마는 백화점에 입점한 대형 멀티플렉스 맞은 편에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치를 떠올리게 하는 이 극장도 입소문을 타면서 지역 주민들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사계절출판사가 만든 에무처럼 더숲은 대형서점 노원문고의 탁무권 대표가 극장, 북카페, 갤러리 등이 함께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2016년 개관했다.
더숲아트시네마는 예술영화 가운데서도 개봉여건이 더 열악한 한국독립영화의 상영기회를 만드는데 공을 들인다. 더숲의 이호준 프로그래머는 “극장과의 끈이 없으면 한국독립예술영화는 국외 예술영화보다 개봉이 더 힘들다. 지난해 개봉한 <역할들>은 더숲에서 처음 개봉을 하고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으로 상영관이 늘어났다. 올 6월 개봉한 <안나푸르나>도 극장 잡기 어려운 상황에서 황승재 감독의 전작을 함께 상영하는 기획전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감독이 참여하는 관객과의 대화를 최대한 늘려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도 나누는 동아리 의식은 멀티플렉스가 아닌 예술영화관으로 관객을 모이게 하는 중요한 동인 중 하나다. 이상용 영화평론가가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하나의 테마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네모어’는 더숲에서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 중 하나다.
관객을 끌어모으기 좋은 작품을 발굴하고 기획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멀티플렉스가 비싼 고급 의자나 스크린엑스(X)같은 특별관 등을 강화하는 데 반해 예술영화관에는 북카페, 루프톱, 테라스 같은 아늑한 공간 등으로 ‘단골 관객’을 만든다.
코로나 때 실내 상영공간 제한으로 인한 자구책으로 에무시네마가 마련했던 옥상 야외상영 기획전 ‘별빛영화제’는 예매 사이트가 오픈 직후 매진사례가 반복되며 이 극장이 명소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관객들의 호응으로 매주 5월~10월 목~일요일 상설상영으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예매가 열리면 언제나 빠르게 매진된다.
올해로 개관 10년차를 맞은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도 멀리 관악산이 보이는 테라스 상영으로 극장의 인지도를 높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이 앉아 있을 곳도 마땅치않은 멀티플렉스와 달리 널찍한 테라스는 단골 관객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수도 있고 극장보다 편한 분위기에서 관객과의 대화(GV)도 이뤄지는 독특한 공간이다.
요즘 멀티플렉스에서도 중요한 마케팅 방식이 된 굿즈는 예술영화관에서 시작되고 보편화한 관객유인책이다. 90년대 카페 등 실내 장식의 아이콘이었던 <베티 블루 37.2>,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삼색’ 시리즈 등 영화 포스터가 영화 굿즈의 시작으로 예술영화관들은 지금도 거의 모든 상영작에 포스터나 엽서, 아트티켓 등의 굿즈를 제공한다. 예술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장면 포스터를 받기 위해 영화를 보러 오는 젊은 층이 적지 않다. 아트나인이 넓은 테라스 공간에서 2014년부터 코로나 직전까지 해마다 두차례씩 열었던 굿즈 ‘플리마켓’은 굿즈가 다시 인기를 얻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를 기획한 박혜진 엣나인필름 극장사업부 팀장은 “당시 조금씩 만들던 굿즈 재고가 쌓여 자비에 돌란의 <마미> 개봉과 맞물려 플리마켓을 처음 기획했는데 회를 거듭할 수록 테라스에 다 입장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그때부터 보편화한 예술영화관의 굿즈 문화가 최근 상업영화관까지 확산됐다”고 말했다.
관람료 또한 예술영화관이 멀티플렉스와 경쟁하는 중요한 마케팅 요소 중 하나다. 멀티플렉스와 달리 예술영화관들은 코로나 때 관람료를 1000원 정도만 올려 주중 기준 일반 관람료 1만원으로 멀티플렉스의 3분의 2 수준이다. 또한 코로나 때 줄어든 관객을 회복하기 위해 아트나인은 매주 월요일 하루 종일, 광화문 씨네큐브는 화요일 저녁 자체적으로 관람료를 7000원으로 내렸다. 에무와 더숲은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저녁 시간에만 적용하는 문화의 날 할인을 하루종일 적용한다. 아트나인은 해피먼데이 운영 이후 월요일 관객이 갑절 가량 늘었다. 관람료에 대한 고민 없이 통신사 할인 등에만 의존하는 멀티플렉스와는 다른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영화진흥위원회가 내놓은 ‘독립·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사업 현황 및 개선방안을 위한 연구’를 보면 2022년 전국에 운영되는 독립·예술영화관은 69개로 서울에 절반인 34개가 있다. 대부분이 영진위의 지원금이 없으면 운영이 불가능한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기도 하다. 에무시네마의 양인모 프로그래머는 금전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예술영화관의 안정적 운영과 관객층 확산을 위해 공공 라이브러리가 강화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오즈 야스지로나 나루세 미키오 같은 거장 작품들은 일본 아트하우스 어디선가에서는 365일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박찬욱이나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등 거장 감독의 전 작품을 언제나 볼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관객층이 두터워질 것”이라면서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예술영화관들이 한국 고전영화의 상영문턱을 낮출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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