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명 희생된 고지쟁탈전… 피로 쓴 평화수호 우리 몫 [한·미동맹 70주년]

박수찬 2023. 7. 24.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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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6·25戰 격전지를 가다… 강원 철원 백마고지
70여년 전 전투 되새기며 경각심… 첨단 장비 동원 ‘철통경계’
1951∼1953년 유엔·중공군 전투
열흘간 24차례나 주인 바뀌기도
김종오 장군 효과적 지휘로 승리
국군 사상자 수도 3400여명 달해
“전투 없다고 전쟁 끝난 것 아냐”
소초장·소초원, 경계작전 최선

70여년 전 이곳은 ‘철의 삼각지’로 불렸다. 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 그리고 중공군은 휴전협상 주도권을 장악하고 영토를 한 뼘이라도 더 얻고자 1951~1953년 여기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였다. 양측이 도합 27만여발의 포탄을 퍼부으며 혈투를 벌인 어느 산은 전투 이후 아예 지형이 바뀌어 하늘에서 보면 백마와 같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전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높이 395m의 이 평범한 산이 6·25전쟁 최대 격전지인 강원 철원 백마고지다.

전적비 부근서 바라본 백마고지 지난 10일 강원 철원 백마고지 전적비 부근에서 기자가 망원경을 통해 비무장지대(DMZ) 내 백마고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철원=남제현 선임기자
◆고지전의 상징, 백마고지 전투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한 구름이 낮게 깔린 10일 아침 철원읍 민통선을 넘어 남방한계선에 있는 일반전초(GOP)로 향했다. 가는 길 좌우에는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영농증을 발급받은 사람들만 이곳을 드나들며 농사를 짓고 있다. 농번기인 4월과 9월엔 출입자가 늘어난다고 한다. 험준한 산세로 가득한 다른 최전선 지역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곳을 관할하는 육군 제5보병사단 장병들의 안내를 받아 백마고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섰다. 백마고지는 물론 고지를 휘감으며 임진강으로 흘러가는 역곡천과 그 위를 지나는 백마교, 화살머리고지(281m) 등 6·25전쟁 격전지가 철책 너머로 시야에 들어왔다.

어찌 보면 강원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산악지대이지만, 이곳은 백마고지와 정전협정 체결 후 첫 비무장지대(DMZ) 내 유해 발굴이 이뤄진 화살머리고지를 나란히 품고 있다. 두 고지를 바라보니 70여년에 걸쳐 군사적 대립과 화해 그리고 갈등이 공존했던 한반도 현대사와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안내를 맡은 군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 일대는) 백마고지 전투 당시 김종오(1921∼1966) 장군의 전방지휘소가 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김 장군은 6·25전쟁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전후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지냈다.
육군 5사단 관계자가 10일 강원 철원 백마고지 인근에 세워진 전적비를 가리키고 있다. 철원=남제현 선임기자
6·25전쟁 초반 국군 6사단을 이끌고 춘천 전투에서 북한군 남하를 저지한 김 장군은 북한군이 가장 경계하는 지휘관에 꼽혔다. 1952년 5월 9사단장에 임명된 그는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이 장악한 철원평야를 노렸다. 1952년 10월6일을 기해 3개 사단 4만5000명의 병력을 백마고지 일대에 투입해 총공세에 나섰다. 이를 맞아 9사단은 10월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고지 주인이 바뀌는 혈투를 치른 끝에 승리했다.

전투 기간 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이 21만9954발, 중공군은 5만5000발의 포탄을 각각 쐈다. 패배한 중공군은 사상자가 1만여명에 달했다. 승자인 국군도 3400여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했다.

김 장군은 교전 내내 적절한 증원군 투입과 교대 등을 통해 백마고지 전투를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이를 통해 국군이 단독으로 중공군과 싸워도 충분히 이길 능력을 갖췄다는 점을 유엔군에 입증했다. 당시 미군 등 유엔군 일각에 퍼져 있던 ‘한국군은 중공군을 두려워한다’라는 인식을 불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눈을 서북방으로 돌리니 화살머리고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백마고지와 더불어 6·25전쟁 기간 철원평야를 지키는 데 필수적 요충지로 중공군의 집중 공격 대상이었다. 1952년 10월 6~10일 미 육군 3사단 소속 프랑스대대가 중공군과의 격전 끝에 고지를 사수했다. 중공군은 1953년 6월29일~7월11일 또다시 공격을 감행했으나 국군 2사단이 막아냈다.

60여년이 흐른 2019년부터 2년 반 동안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른 DMZ 내 남북 연결 도로가 만들어졌다. 사상 처음으로 DMZ 안에서 유해 발굴도 이뤄졌다. 발굴된 유해 424구 중 국군 전사자 9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지형 설명 육군 5사단 관계자가 지난 10일 강원 철원 백마고지 일대에서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 인근 지형을 설명하고 있다. 안내도에 표시된 붉은색 점선 중 오른쪽이 백마고지, 왼쪽이 화살머리고지다.
◆병력과 첨단 장비로 ‘철통경계’

백마고지 일대를 살펴본 기자는 화살머리고지와 가까운 A소초로 이동했다. 목표 지점에 가보니 인접한 철책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들이 DMZ와 철책 주변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다.

백마고지 일대는 일교차가 심한 날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그로 인한 감시 공백을 막고자 철책에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갖췄다. 카메라가 철책 주변과 전방을 24시간 감시한다. 철책에는 그물망처럼 생긴 광망을 부착해 절단 시도 등도 감지한다.

다만 아직은 경계시스템이 사람 역할을 100% 대신할 수 없다. A소초 장병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경계작전을 수행한 지 거의 1년이 됐다는 분대장 김명준 상병은 “카메라가 못 보는 구역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근무 서는 시간에는 감시 장비를 모두 활용해 동물이든 사람이든 무조건 잡겠다는 생각으로 근무한다”고 말했다. 소초장 최동욱 중위는 “안개 등으로 기상 상황이 변하면 상부에 건의하거나 상부 지시에 의해 고가초소에 병력을 추가 투입하는 등 방식으로 강화된 경계작전을 실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가족·친지와 헤어져 험준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최전선에서 무기를 든 채 북한군과 대치하는 것은 장병들에게 상당한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준다. 24시간 경계 체제까지 더해지면 정신적·육체적으로 쉽게 지칠 수 있다.

소초원들은 백마고지 전투를 되새기며 경각심을 일깨우고 긴장감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최 중위는 “눈앞의 저 고지(백마고지)가 6·25전쟁 때 포탄 27만여발이 떨어지고 열흘간 주인이 24차례나 바뀐 게 느껴지느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이어 “작전을 앞두고 있을 때나 교육 시간마다 ‘지금 전투가 없다고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안주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긴장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고 덧붙였다. 김 상병은 “고가초소에서 근무하면 격전지였던 백마고지·화살머리고지가 보인다. 그때마다 ‘내가 평화롭게 있는 것은 누군가의 숭고한 희생과 노력 덕분’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경계작전에서 긴장과 경각심을 갖는 것은 필수이지만, 과도한 긴장은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스트레스를 풀어줄 필요가 있는 셈이다. A소초원들의 해소법은 전우들과의 친목활동이다. 김 상병은 “휴식 또는 개인 정비 시간에는 분대 단위로 전우들끼리 군마트(PX)에 가거나 체력단련을 하는 등 친목활동을 하면서도 최소한의 긴장은 유지한 채 생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철원=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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