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동성부부’ 축복의 만삭 파티…“네 작은 발, 세상에 큰 자국”
“보내주신 악플은 교육비와 돌잔치 비용으로 쓸게요”
보랏빛 망사로 된 치마를 입고 등에 날개를 단 ‘트랜스젠더 여성’ 세레나와 ‘기혼 레즈비언’ 루신다가 하얀 봉에 매달린 흰색 종이 인형을 여러 차례 두드렸다. 종이 인형이 터지지 않고 바닥에 떨어지자, 세레나가 종이 인형을 들어 아랫부분을 뜯었다. 이어 분홍색 종이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세레나가 말했다. “여러분, 라니의 섹스는 여성입니다.” 하객석에서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세레나는 “라니의 작은 발이 세상에 큰 자국을 남기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라니’는 동성 커플로는 처음으로 임신 사실을 공개한 김규진(31)·김세연(34)씨 부부의 뱃속 아이 태명이다. 규진씨 부부의 친구가 대신 꾼 태몽에서 따왔다. 온실 중앙에 큰 난초가 있었는데, 꽃은 동양란, 잎은 서양란의 모습을 한 꿈이었다고 한다. 벨기에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한 규진씨 상황과 일치하는 꿈이었다.
규진씨는 “저희 부부는 드라이한 사람들이라 태몽을 안 꿨는데, 딱 ‘우리 태몽이다’ 싶었다”고 말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부부와 하객답게 ‘난이’, ‘란이’, ‘라니’ 편한 대로 부른다.
규진씨 부부는 22일 낮 서울의 한 호텔에서 ‘대한민국 저출생 대책 간담회’라는 제목의 베이비샤워를 열었다. 9월에 태어날 라니를 환영하고, 자신들의 임신과 출산을 축복받기 위해서였다.
“4년 전 저희가 결혼한다는 기사에 ‘레즈비언이 나타나면 출산율이 떨어진다’는 댓글이 많이 달렸는데, 제가 아이를 낳게 됐어요. 좀 통쾌하지 않나요.”
출산을 한달여 앞두고, 만삭의 둥근 배가 보이는 배꼽티를 입은 규진씨가 하객석을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우스개를 했다.
4년 전 미국에서 혼인신고를 한 규진씨 부부는 지난달 말 임신 사실을 공개했다. 임신을 공개한 기사엔 축하뿐 아니라 부부를 비난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규진씨 부부는 악플러들을 비웃듯, 4년 전 부부의 결혼 기사에 악플을 단 이들에게 받은 합의금으로 베이비샤워를 열었다.
사회를 맡은 금개가 이런 내용을 알리며 “임신 기사에 악플을 다는 건 아이의 교육비와 돌잔치 비용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하자, 하객 약 70명이 환호했다. 성소수자가 다수인 하객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규진씨 부부는 행사 전부터 사진작가에게 하객 사진을 찍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날 행사는 규진씨 부부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회자 금개와 답변자 규진 부부의 ‘티키타카’(말 주고받음)에 현장은 웃음과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금개가 “세연씨가 아닌 규진씨가 왜 임신했나요”라고 묻자 규진씨는 “‘와이프 고생시키는 게 싫었다’고 말하려고요”라고 답했다. 옆에서 세연씨가 “규진이 임신했다는 기사에 ‘여기는 남편이 임신했다’는 댓글도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정자 기증자 선정 과정’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규진씨는 “이 자리에 온 게이 친구들에게 정자를 기증받는 ‘정자듀스 101’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이어 하객의 시선이 남성 하객으로만 구성된 테이블에 쏠려 또 폭소가 터졌다. 이어 규진씨는 “한국에선 (제가 법적 비혼 상태라)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받을 수도 없고, 정자를 구매하는 게 불법이라 벨기에에서 시술을 받게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 대부분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출생 대책’, ‘성소수자 혐오’, ‘혈연 중심 가족주의’를 비꼬는 현장이었다. 규진씨 부부는 임신과 출산을 축하하는 자리인데도, ‘아이를 낳지 말자’는 가사가 담긴 곡으로 축가를 골랐다. 가수 이랑의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다.
이 곡을 선곡한 이유에 대해 규진씨는 “저한테 ‘애국자다’ ‘셋째까지 낳아라’ 이렇게 얘기하는 분도 있는데, 제가 아이를 낳자는 국가의 프로파간다(선전)를 하려고 애를 낳는 건 아니”라며 “아이를 낳고 말고는 전적으로 자신이 결정할 일이라는 뜻에서 곡을 신청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라니의 생물학적 성별을 공개한 행사 ‘젠더리빌’이라는 명칭도 모순적이었다. 생물학적으로 지정된 성별인 ‘섹스’와 달리, 성정체성을 뜻하는 ‘젠더’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에 태어나기 전에 미리 알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섹스와 젠더의 불화를 몸으로 느낀 성소수자들이 ‘젠더를 미리 공개’하는 건 성별 이분법 사회를 비꼬는 것이다.
이날 행사엔 장혜영 정의당 의원도 참석해 ‘생활동반자법 의의와 내용’을 주제로 발제했다. 장 의원은 “생활동반자법을 ‘동성혼의 순한 맛’ 버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동성애·이성애 커플을 떠나, 애정관계의 유무와 상관없이, 새로운 가족 관계를 구성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규진·세연·라니님의 가족을 포함해서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가족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장 의원은 다양한 가족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생활동반자법·비혼출산지원법)을 발의한 바 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이 ‘아이의 미래가 걱정된다’며 독설을 내뱉을 때, 규진씨 부부 곁에 있는 이들은 라니를 위해 함께 세상을 바꾸겠다고 했다.
4년 전 규진씨 결혼식 진행을 맡으며 인연을 맺은 웨딩플래너 김영주(가명·34)씨는 “규진씨 부부의 결혼 과정을 함께하며 원가족도 봤는데,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아이까지 출산하니 뭉클해요. 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생활동반자법안 등도 통과되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 오은지(가명·35)씨는 “규진씨 부부에게 성소수자들이 많은 빚을 지고 있어요. 두 부부가 앞장서서 이야기해줘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규진씨는 행사를 마친 뒤 “사회자·게스트·하객의 도움으로 정상성과 퀴어니스가 섞인 즐거운 행사가 되어 기쁘고, 행사에 의도치 않게 기여하신 악플러분들은 앞으로 주변 소수자들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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