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링컨센터 전석 매진… 전통·현대 어우러진 춤에 기립박수
20일 저녁 미국 뉴욕 링컨센터 데이비드 H 코크 극장. 서울시무용단 ‘일무(佾舞)’ 70분 공연이 끝나자 환호와 박수 소리가 극장을 채웠다. 연출을 맡은 디자이너 정구호와 서울시무용단 정혜진 단장이 등장할 즈음엔 거의 모든 관객이 기립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링컨센터는 미국 공연 예술의 ‘심장’. 이곳이 우리 전통 춤 공연을 본 현지 관객들의 환호로 달아올랐다. 낯설지만 가슴 벅찬 풍경이었다.
◇3차례 공연 각 1800석 모두 전석 매진
‘일무’ 공연은 링컨센터가 올해 처음으로 연 ‘한국 예술 주간’(Korean Arts Week·19~23일) 프로그램 중 하나. 크라잉넛과 세이수미가 한국 인디음악을 선보이고,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 등을 초청한 한국문학 소개 강연도 열리는 등 총 17개 프로그램이 마련된 가운데 ‘일무’는 유일한 유료 공연이었다. VIP석 가격이 브로드웨이 공연에 맞먹는 190달러(약 24만원)에 달했는데도 20~22일 세 차례 공연 각 1802석이 일찌감치 전석 매진됐다. 입소문이 나면서 정가의 두 배, 400달러가 넘는 암표가 나돈나는 얘기도 들려왔다. 20일 극장에 온 관객들을 살펴 보니, 교포·주재원 등 한국계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아 보였다.
유명한 명품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 등 뉴욕 문화계 인물들도 다수 이번 공연을 관람했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수석 무용수 이사벨라 보일스턴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무용수들이 경이롭고, 숨이 멎는 줄 알았다”며 극찬했다. 전 마이애미 발레 수석무용수이자 뮤지컬 배우인 알렉스 웡은 “아름답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잊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했다. 전문가와 예술가 뿐 아니라 일반 관객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카리브해 출신 이민자로 뉴욕시 교통국 전기기술자로 일한다는 안드레스는 “느리고 우아하던 춤이 진화하듯 초고속으로 변화하는 이런 공연은 처음이었다. 한국의 춤이 너무 아름다워 다른 작품이 온다면 다시 보러오고 싶다”고 했다.
◇”우리 춤이 美 예술 ‘심장’서 환호받은 날”
“아,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네요.” 산하 단체인 서울시무용단을 이끌고 뉴욕에 온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도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국립극장장 등을 지내며 숱한 풍파를 겪었지만 밖으로 감정 기복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였다. “6년 전 국립극장장으로 링컨센터에 왔을 땐 중국·일본 등과 달리 한국과의 협력엔 미온적이었어요. 그런데 작년 영국 런던에서 바비칸과 로열오페라를 방문했더니 극장 예술감독이 직접 나와서 1시간 넘게 단독 미팅을 하며 이것저것 적극적 제안을 하더군요.” “링컨센터가 코로나 봉쇄가 풀린 뒤 첫 시민 페스티벌에 한국 특별 프로그램을 준비한 것 자체가 한국 문화에 대한 달라진 평가와 시선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16일 자 일요판에 특집 기사 ‘한국 춤의 모던한 변신’을 낸 것도 현지 예술 마니아를 움직였다는 평가. NYT는 ‘일무’를 “전통과 현대의 변증법적 조화와 증식을 보여준다”며 극찬했다. 뉴욕 공연 PR 에이전트인 빌리 제이블슨 ‘리처드 콘버그 & 어소시에이츠’ 부사장은 “한식당 맛집에서 친구와 약속을 잡고 H마트 드나드는 뉴요커들이 늘던 중에 K팝과 K드라마로 한국이 더 친숙해져, 링컨센터가 ‘한국 예술 주간’을 연다는 소식을 다들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여겼다”고 했다.그는 “무엇보다 작품 자체의 뛰어난 수준, 시각적·음악적 아름다움이 링컨센터 무대에 오르고 NYT가 주목하게 된 첫째 이유”라고 덧붙였다. SK그룹이 최근 수년 새 링컨센터 공식 스폰서로 미국 문화계에 발을 넓히고 있었던 것도 결정적 도움이 됐다.
◇파격적 재해석한 한국美 숨 멎는 듯한 비주얼
‘일무(佾舞)’는 원래 줄[佾]을 지어 추는 제례무를 일컫는 말. 국가무형문화재이며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의식무(儀式舞) 등 우리 전통 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4막으로 구성됐다. 이번 뉴욕 공연에선 좀 더 간결하게 ‘One Dance’로 번역돼 소개됐다.
특히 궁중 연회 무용 ‘춘앵무(春鶯舞)’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2막과 1~3막의 전통과 현대적 요소가 융합돼 새로운 춤으로 다시 태어나는 4막 ‘신(新)일무’는 압권이다. ABT 수석무용수 보일스턴이 “녹색 드레스를 입은 춤이 가장 좋았다”고 찬사를 보낸 ‘춘앵무’ 는 본래 조선 정조의 손자 효명세자(1809~1830)가 어머니 순원왕후 김씨의 4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1828년 창안한 춤. 새로 해석한 춘앵무에선, 무용수들 발 아래 있던 붉은 화문석이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공중으로 들어올려지고, 녹색 치마를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제자리에서 회전한다. 마치 도자기 작품을 빚어내는 듯 하다.
느리고 우아하던 춤은 뒤로 갈수록 점점 속도감을 더해, 4막 ‘신일무’에선 많을 땐 35명의 무용수가 한꺼번에 무대 위에 뛰어든다.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빠르게 움직이면서 직선과 사선, 기하학적 도형을 무대 위에 그리고, 그 호흡으로 조이고 풀기를 반복하며 관객의 시선과 호흡까지 장악하는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준다. 엄청난 속도감 때문에 보라색 소매 끝에 매달린 듯한 무용수들의 흰 손이 마치 쥐불놀이 불꽃처럼 잔상을 남기며 무대 위를 휩쓴다.
국립무용단 ‘향연’과 ‘산조’ 등의 작품으로 한국적 미와 현대성을 조화시키는 작업을 해온 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을 맡았고, 서울시무용단 정혜진 단장과 현대무용가 김성훈, 김재덕이 안무로 힘을 모았다. 음악도 압도적이다. 안무가 김재덕은 음악도 맡아 나무로 된 호랑이처럼 생긴 타악기 ‘어(敔)’를 드럼처럼 두드리거나, 아쟁을 현악기처럼 활용하는 등 실험적 시도로 EDM(전자 댄스 음악)을 방불케 하는 리듬을 만들어냈다.
◇인종혐오범죄에 ‘몸살’ 뉴욕, “예술이 치료제”
코로나 시기 반(反)아시안 증오 범죄로 몸살을 앓은 미국 뉴욕이 “분열과 증오를 넘어설 사회적 치료제로서의 문화”(샨타 타케 링컨센터 수석예술감독)라는 관점에서 ‘일무’ 공연이 포함된 한국 예술 주간을 마련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타케 감독은 ‘일무’를 “혼절할 것 같은 수준의 시각적 충격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름답게 연결했다”고 평했다. 그는 “서로 등 돌렸던 사람들이 다시 함께해도 안전하다는 걸 믿게 하고, 당신과 내가 차별 없이 오직 무대에 집중하며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게 하는 라이브 공연의 힘은 크다. 이번에 한국 예술과 압도적 흡인력을 지닌 무용 ‘일무’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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