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407] 일본 고민가의 리모델링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2023. 7. 2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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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히메현(愛媛縣) 오즈시(大洲市)를 제주항공으로 다녀왔다. 세토내해(瀨戶內海)와 붙어 있는 지역이다. 일본의 역사지리를 대관(大觀)해 볼 때 세토내해는 굉장한 장점이었다. 내해를 통해서 물류와 수군(水軍)이 발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 세계의 물류는 바다를 통한 선박이 주요한 수단이었고, 여기에 따른 해군의 발달이 패권의 포인트였다. 일본은 세토내해가 있었기 때문에 해상무역과 수군이 발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일본을 세계의 강국으로 만든 요인이었다.

다이묘 밑에 편입되어 있을 때는 수군으로 활동하다가 편입이 느슨해지면 해적으로 활동했던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 그 해적의 본부인 오미시마(大三島)도 에히메현에 있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사무라이 집단이 해체되었고, 해적의 후손들은 히로시마의 조선업에 종사하거나 일본 해군으로 들어갔다. 해상무역을 담당하던 상인 집단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통제가 느슨해 지면서 더 번창하게 되었다. 오즈의 상인들은 메이지 이후로 부를 축적하였다. 상품 품목은 목랍(木蠟), 종이, 실크였다.

목랍은 옻나무과에 속한 나무 열매에서 나온 식물성 왁스이다. 불을 켜는 초, 화장품 등의 재료였다. 전깃불 이전에는 세계가 초를 써야만 했다. 그 초의 재료인 목랍을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수출해서 떼돈을 벌었다. 그 상인들이 거주하던 주택들이 오즈에 밀집되어 있었다. 대략 185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지어진 상인들의 주택이었다. 이걸 고민가(古民家)라고 부른다. 그러나 저출산과 노령화로 인구가 줄자 빈집들이 늘어갔다. 시 당국과 지역 주민, 그리고 민간 자본, 호텔 업자들이 연합하여 이 빈집들을 호텔로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빈집들이 31개의 호텔 객실로 리모델링되었다. 숙박비도 싼 편은 아니었다. 빈집들에 수십개의 상점도 새로 생겼다. 카페, 공예품 가게, 레스토랑 등등. 이런 가게에는 그 지역 청년들이 우선적으로 운영, 또는 취업하도록 인센티브를 줬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현장이었다.

오즈의 목랍업자 가운데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지은 가류산장(臥龍山莊)도 볼만했다. 강물이 돌아 나가는 언덕에 지은 정원이었다. 용의 머리는 강물을 마시고 있는 형국이고, 그 용의 몸통에 지은 다실정원(茶室庭園)이었다. 강물의 배를 타고 와서 내리면 용의 머리로 올라와 용의 목 뒤를 타고 걸어오면 다실에 들어올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신룡음수(神龍飮水)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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