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70년 전 휴전 알린 송해를 생각한다
운명 탓한다고 남의 것 되지 않아… 땡을 받아봐야 딩동댕을 안다
1953년 7월 27일, 육군본부 통신병들은 손가락과 마음이 바빴다. 전군으로 보내야 할 일급전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머리에 ㅂ자가 붙어 있으면 보통 전보, ㄱ자가 있으면 긴급 전보, ㅇ자가 있으면 일급 전보였다. 통신병들은 암호로 된 모스 부호를 내용도 모르는 채 송신했다.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점으로 모든 전선의 전투를 중단한다’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6·25전쟁 참전 용사이자 국가유공자 송해(1927~2022)는 그날 유엔군과 중공군 및 인민군 사이에 휴전이 성사됐다는 사실을 처음 전파한 통신병들 중 한 명이었다. 황해도 재령이 고향으로 징병을 피해 1950년 12월 혈혈단신 월남한 그는 “(고향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돌아갈 길을 내가 끊은 것”이라고 탄식하곤 했다.
정전(停戰) 70년은 잿더미가 된 나라를 재건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도약한 세월이기도 하다. 본명이 송복희였던 청년은 유엔 군함에 실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망망대해에서 ‘바다 해(海)’를 따 이름을 다시 지었다. 지난 70년은 송해 개인으로 보면 낯선 땅에서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한 인생 역정과도 같다.
만기 제대를 했지만 남쪽에는 일가친척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해주음악전문학교를 다닌 경험을 살려 악극단 문을 두드렸다. 자원이 한정돼 있는 악극단은 단원이 노래, 연기, 사회(MC)를 두루 잘하지 못하면 바로 잘랐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시절, 송해는 그 지옥 훈련을 이겨내며 무명에서 단역으로, 조연으로 올라왔다. 주연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세대가 가장 불행하다고 푸념하지만 송해 세대에 비하면 잘 먹고 잘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송해는 이념의 칼질을 몸으로 겪었다. 전쟁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고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정전 후에도 인생은 불안정해 3년 앞을 보장할 수 없는 삶이 계속됐다. 송해는 “생애 전체가 공포였다”고 했다.
“잡을 것 없는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기분이 늘 들었어요. 평생 3년 계획을 못 세워봤습니다. 방송은 춘하추동 4계절 개편을 하잖아요. 다음 계절에도 이걸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했어요. 힘들어서 중도 하차하는 경우도 많이 봤지요. 하지만 돌아보면 유랑극단부터 전국노래자랑까지 배역을 맡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게 큰 경험과 자산이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전국노래자랑을 인생의 교과서로 불렀다. 아들을 잃고 ‘야전 부대’처럼 전국을 떠돌며 바람이나 쐬자고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만인 앞에 서려면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읽어야 했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생활이 묻어나는 무대였다. 참가자 중 누구는 딩동댕 소리를 들었고 누구는 땡이었지만 송해는 “땡이 있어야 딩동댕이 있다”고 위로했다.
땡을 받아봐야 딩동댕의 가치를 안다. 전국노래자랑으로 송해는 34년간 1000만명을 만났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그 앞에서 마음을 열었고 송해는 입을 열어 그 지역 특산물을 맛있게 먹었다. 그가 대중과 맺은 다정한 관계는 오빠, 형, 아버지, 할아버지, 선생님 같은 호칭들만큼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에 그런 사람이 또 있었나?
70년 전 육군 통신병 송해가 전보를 보냈을 때 남과 북은 똑같이 폐허였다. 그런데 지금 남한은 번영했는데 북한은 왜 여전히 가난한가. 미래를 향해 나아간 나라와 남한·미국 탓만 하며 불행한 과거에 갇힌 나라의 차이다. 전쟁의 소용돌이를 뚫고 일어선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며 송해를 생각한다. 그는 “내 인생 목표는 딩동댕으로 남는 것이었다”고 했다. 운명은 탓한다고 남의 것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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