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난’과 ‘량차이’의 황당한 도시, 서울
서울지하철 2호선과 3호선, 신분당선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구간이 있다. 강남역과 양재역 정차를 앞둔 구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곧 정차할 역을 알려주는 안내방송이 나오는 순간이다. 한국어와 영어에 이어 나오는 중국어 안내방송 코멘트가 황당해서다. “다음 도착할 역은 ○○역입니다”를 뜻하는 중국어 “첸팡다오잔스(前方到站是)”에 이어 해당 역이름을 강남(江南)은 “장난”, 양재(良才)는 “량차이”라고 일러준다.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과 ‘양재’가 졸지에 중국의 거리로 둔갑한 건지, 혼란을 일으킨다. 한국과 중국이 같은 한자 문화권이고, 두 곳의 지명이 똑같은 한자로 돼 있으니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발음을 해주는 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서울에 와서 길을 찾는 중국인들이 지나가는 한국인을 붙잡고 ‘장난’과 ‘량차이’를 아무리 외친들 알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반면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중국인이라도 지나가는 한국인에게 ‘강남’과 ‘양재’를 외치며 손짓발짓을 동원한다면 길 찾는데 도움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를 현지 발음대로 불러줘야 하는 이유다. ‘강남’과 ‘양재’를 ‘장난’과 ‘량차이’로 발음해주는 것은 중국인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중국어 방송과 달리 일본어 방송에서는 다음 도착할 역을 안내할 때 ‘강남’과 ‘양재’로 발음한다. 일본도 고유의 발음체계를 가진 한자 문화권 국가이지만, ‘강남’과 ‘양재’를 그들 발음에 맞춰 ‘고난(江南)’과 ‘료사이(良才)’로 바꿔 불러주지 않는다. 이런 발음 방식 차별이 중국인과 일본인들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도움을 줄지는 불 보듯 뻔하다. 중국에만 한국의 거리 이름을 그들 발음에 맞춰 발음해주기로 한 게 어떤 뜻에서였건, 결과적으로 중국인들에게만 폐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지명(地名)은 고유명사이고, 고유명사는 원래 발음대로 읽고 말하는 게 원칙이고 순리다. 한때 중국 수도를 북경(北京), 일본 수도를 동경(東京)으로 표기하고 발음했던 우리나라가 현지 발음에 맞춰 ‘베이징’과 ‘도쿄’로 바꿔 부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베이징을 방문한 한국인이 톈안먼(天安門) 가는 길을 물어보면서 ‘천안문’을 외치고, 도쿄에 가서 롯폰기(六本木) 대신 ‘육본목’을 수소문해서 뭘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실리적인 측면을 떠나서, 엄연한 우리나라 지명을 스스로 다른 나라 한자 발음으로 뒤트는 행위는 6·25전쟁 때의 수치스러운 장면을 상기시킨다. 1950년 11월, 중국이 북한을 도와 한반도를 기습 침공하면서 전쟁 양상을 바꾼 대표적 장면으로 ‘장진호 전투’가 꼽힌다.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에서 미 해병대 1사단과 중공군 10개 사단이 벌인 치열한 전투는 ‘세계 3대 동계 전투’에 꼽힐 정도로 치열했다. 그런데 이 전투를 기록한 미국의 대부분 문서가 ‘장진호’가 아닌 ‘초신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로 적고 있는데, 이유가 기막히다. 한국이 일본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돼 전쟁이 일어난 바람에 당시 미군이 소지한 한반도 지도가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지명을 표기하고 있었던 탓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호수 이름이 일본식 ‘초신(長津)’이 아니라 ‘장진’임을 알리는 일에 대한민국 정부와 관련 학계는 아직도 진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 나라에서 ‘장난’과 ‘량차이’라니.
지하철에서의 역 안내방송을 갖고 시비(是非)를 길게 따지는 데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업(業)의 본질’을 간과한 데서 빚어진 대표적 사례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의 역 안내방송은 승객들에게 목적지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본질이다. 강남을 ‘장난’, 양재를 ‘량차이’로 호도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다. 무슨 일이 됐건 그것을 왜 하는지 본질을 젖혀둔 채 달려들고, 대충 때움으로 해서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내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계기로도 삼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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