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바다 사람의 ‘괴상한’ 그리움을 보다
요 몇달간 제주를 다녔다. 지역에 대한 잡지를 만드는 일은 낡고 오래된 연재만화의 이야기 구조와 좀 닮았다. 주인공은 사연이 있는 떠돌이로,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진다. 간신히 해결하고 익숙해질 때쯤 다른 곳으로 떠난다. 아쉬운 작별 후에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만남과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제주행 비행기를 탈 때면, 나는 이번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재만화에도 가끔 분량조절에 실패해서 길어지는 회차가 있지 않은가. 최근 몇달간 내게 주어진 도시의 삶은 무덥고 신산했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의 이륙을 기다리다 악천후로 인해 지연되는 중이라는 안내방송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어쩔 수 없이 비행기가 못 뜬다면 서울의 일정과 회의들이 ‘피치 못하게’ 취소되겠지. 그러면 멍하게 폭풍우나 바라보면서 책이나 읽을까. 배움에 늦은 나이는 없다고 했으니 담배나 배워 볼까. 하지만 활주로에서 기회를 노리던 비행기는 한사코 이륙에 성공하고, 파김치가 된 나를 김포공항에 가뿐히 내려놓는다.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하고 나는 투덜거린다. 공항이 있는 도시에서 제주도에 가려면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제주는 마치 모든 육지 사람들의 가까운 휴양지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훌쩍 떠날 수 있는 부담없는 일상의 공간이자, 어쩌면 내가 사는 도시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장소로.
하지만 잡지를 만들기 위해 제주의 역사를 들추던 나는 연이어 튀어나오는 낯선 모습에 놀라곤 했다. 사실 나의 아버지도 전라도 남쪽의 바닷가 마을에서 나서 자랐다. 하지만 제주 토박이들에 비하면 내 친척들은 확실히 ‘육지 사람’으로 느껴진다. 이런 막연한 느낌을 설명하는 일은 참 어렵다. 그러니까 육지의 바닷가에 사는 이들의 삶은 배후의 대도시들, 그러니까 광주나 서울 같은 곳과 함께 맞물려서 작동한다. 그러나 전통 사회에서 제주 사람들의 삶에는 바다가 훨씬 더 깊고 크게 자리하는 듯하다.
바다는 육지로 향하는 교통로이자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며, 태풍과 해일을 동반한 공포의 대상이면서도 따뜻한 삶의 터전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의 상상력은 꽤 장쾌하고 호방하다. 예를 들어 창세 신화인 ‘천지왕 본풀이’나 제주섬 창조 설화인 ‘설문대할망’ 이야기가 이곳에는 있다. 육지의 신화에서 환웅이 ‘원래 있던’ 태백산에 내려온 것과는 사뭇 다르다. 역사의 국면에 대응하는 태도도 달라서, 오래전부터 이곳의 바다 사람들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한반도와 중국, 일본, 오키나와와 대만 등을 향해 거침없이 교류했다. 육지의 정치가 가혹해질 때면 바다로 도망가 다른 섬이나 바닷가에 자리를 잡거나, 심지어 해상에서 사는 유민들도 많았다.
교통과 물류가 발달한 오늘날은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곳에서 낯선 슬픔과 그리움의 파편들을 보았다. 예를 들어, 들어온 원고 중에는 ‘이마트 식품관에는 슬퍼서 갈 수 없다’는 제주 토박이의 말이 있었다. 아름다운 먹돌 해변이 있던 탑동 바닷가를 매립한 곳이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그는 자맥질하며 놀던 바다가 사라졌음을 느낀다. 포장마차엔 옛 먹돌 해변의 소리가 그리워 술을 마시고 우는 이들도 있다. 매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해변의 먹돌을 주워 들고 집으로 도망친 이들도 있었다. 이 검고 예쁜 돌을 다시 보지 못할까 두려워서.
개발과 보전에 대해 육지에서 온 타지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고 싶다. 당신들 중에는 바다를 정말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그리움의 모습은 바닷가 마을 출신 아버지를 둔 나로서도 낯설고 괴상하고 구체적이었다고. 어쩌면 개발을 반대하는 이들이 한갓진 소리를 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아주 나직하게, 그런 말을 해보고 싶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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