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파국’에 맞게 재설계하라
기후위기 시대 폭우·산사태는 상시 재난, 정부는 구조적·근본적 대책 소극적
“기후는 그저 변화하는 게 아니라, 안정을 잃고 망가지고 있다.”(그레타 툰베리)
우리 국토와 산림은 수천 년간 온대기후에 적응해왔다. 기후변화로 지금처럼 갑작스레 아열대 기후가 확산하는 일은 국토와 산림에도 스트레스다. 와중에 인명 피해가 속출한다. 특히 안정을 잃고 망가져가는 기후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지어진 지하공간이 문제다.
1년 동안 내릴 물의 4분의 1이 사흘 새 쏟아져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린 2023년 7월15일 발생한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사고는 최근 수년간 일어난 지하사고들의 연장이다. 2014년 부산 동래구 우장춘로 지하차도와 2020년 부산 초량 제1지하차도에서도 집중호우로 인한 침수로 인명사고(각각 2명, 3명 사망)가 발생했다. 2016년 울산과 2022년 경북 포항에서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침수돼 각각 1명, 7명이 숨졌다. 기후변화로 인한 극한 기상이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심해지지만, 안전기준은 이를 따라가지 못한 게 근본 원인이다.
이번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직전에 인근 미호강의 임시제방이 무너졌다. 임시제방은 설계빈도 100년인 계획홍수위 28.78m(해발 표고 기준)보다 1m가량 높은 29.74m로 쌓여 있었다. ‘100년에 한 번 올 만한 강수량’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이날 미호강의 수위는 5시간10분 만에 2.4m나 상승(27.47m→29.87m)하며 임시제방 높이를 손쉽게 넘겼다.
극한 기상이 만든 비는 산도 무너뜨린다. 이번 집중호우에선 경북이 그런 경우였다. 경북에서만 사망자 24명과 실종자 3명이 발생했다. 피해가 가장 컸던 예천에서만 14명이 사망하고 3명이 실종됐고 870여 가구 1350여 명이 대피소로 피했다.(7월20일 기준) 예천군의 평년(2011~2020년) 연간 강수량은 978.2㎜였다. 한데 2023년 7월13~15일 263.5㎜의 비가 내렸다. 눈과 비를 합해 1년 동안 하늘에서 내릴 물의 4분의 1이 사흘 사이에 쏟아진 것이다.
이런 수준의 극한 폭우는 단연 기후변화의 영향이다. 2023년의 장마철이 시작된 6월25일 이후 7월18일까지 중부와 남부에 내린 비의 총량(누적강수량)은 각각 532.1㎜, 635.8㎜였다. 평년 장마철 전체 누적강수량(각각 378.3㎜, 341.1㎜)의 두 배에 가깝다. 장마철이 통상 7월 말까지 이어지는 것(평년 기준 중부 7월26일, 남부 7월24일)을 고려하면 명백한 이상 강수다. 전북 군산의 경우 7월14일 0시부터 오후 6시까지 364.8㎜의 비가 내렸는데, 장마철 전체 기간 내릴 비가 하루 만에 쏟아졌다. 군산의 종전 일강수량 최고 기록은 2000년 8월26일 기록한 310㎜였다.
서울시 배수체계는 30년 빈도, 강우량은 200년 빈도
인명사고를 부르는 극한 폭우는 특히 단시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비는 시간당 강우량으로 표시되는데, 기상청은 시간당 3㎜ 미만을 약한 비, 시간당 3~15㎜를 보통 비라 부른다. 강한 비는 시간당 15㎜ 이상, 매우 강한 비는 30㎜ 이상이다. 시간당 30㎜ 이상은 체감상 머리 위에서 물통으로 물을 퍼붓는 듯한 느낌으로 표현된다. 이 정도면 작은 하천이나 하수도에선 물이 넘쳐나고 운전 중 와이퍼를 써도 시야 확보가 어렵다. 한데 최근 내린 비는 이런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서울 관악구에서 반지하방이 침수돼 사람이 숨지고 강남역 사거리가 물에 잠긴 2022년 8월 서울 동작구와 서초구엔 24시간 동안 각각 435.0㎜, 412.5㎜의 비가 내렸다. 이는 1920년 8월2일에 기록한 역대 최고치 354.7㎜를 경신한 것이다. 시간당 최대 강우량도 각각 141.5㎜, 116.0㎜였다. 이 정도면 배수체계 설계용량 200년 빈도(시간당 114㎜)를 넘지만 서울시의 배수체계는 고작 30년 빈도에 불과한 시간당 95㎜로 설계돼 있다. 우리 도시 기반 시설이 기후위기 상황과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보여준다.
문제는 기후위기 시대에 폭우와 범람, 산사태는 지속적으로 발생할 재난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 대책은 근본적 조치와는 거리가 있다. 이번 장마 기간 직전인 2023년 5월19일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범정부 여름철 자연재난(풍수해·폭염) 대책’은 구조적 개선보다는 위험상황 전파와 자구책 보완에 그친 인상이다. 대책을 보면, 시간당 50㎜ 이상의 ‘극단적 호우’가 발생하면 기상청이 직접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재난 문자메시지를 발송한다. 관계기관 간에 정보를 신속히 공유하고 이번에 사고가 난 지하차도나 하천변 같은 인명피해 우려 지역 5397곳에 담당 공무원을 지정해 위험상황 점검과 통제를 하기로 했다. 반지하방 같은 지하공간에 대해선 물막이판 등 침수방지시설 설치를 지원하고 침수에 대비한 국민행동요령을 배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오송 사고에서 보듯 위험상황 전파나 점검, 통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녹색당은 7월17일 성명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폭우와 범람, 산사태는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재난임에도 정부가 취한 조치라고는 물막이판 설치를 지원한 것과 국민재난안전포털에 ‘지하공간 침수 대비 행동요령’을 추가한 것이 고작”이라며 “그 요령이란 것도 ‘물이 조금이라도 차오르면 즉시 대피하시오’ 수준이니 기가 찰 노릇”이라고 비판했다.
개통 석 달 만에 침수된 도로도 있어
물론 정부도 이런저런 중장기 계획으로 구조적 개선책을 시행하긴 한다. 2023년 6월22일 환경부가 발표한 ‘제3차 국가 기후위기 적응 강화대책’에도 그런 내용이 일부 담겼다. 이 대책은 2020년 12월 수립돼 시행 중인 ‘제3차 국가 기후변화 적응 대책(2021~2025)’을 보강한 것인데, 주로 여러 기반 시설의 구조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소하천의 홍수 방어 능력을 높이기 위해 범람 대비 설계빈도를 기존 100년에서 200년으로 상향하거나 대심도 터널, 지하방수로, 강변 저류지 등 범람에 대비한 시설도 지속적으로 확충하기로 했다. 시·군의 기본계획 수립 때 폭우 등의 기후위험을 고려해 도로 설계기준을 강화하고 연안 지역 항만·어항 설계기준도 개선한다.
하지만 이런 대책도 단시일 안에 구현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하천 계획 등은 통상 10년 주기 종합계획을 토대로 하다보니 이런 식의 설계변경을 반영하려면 수년이 소요된다. 그 와중에 기후위기에 취약한 지하공간은 늘어간다. 최근 개통한 서울의 경인지하차도, 서부간선지하도로나 지하 대심도에 지어지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같은 시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후위기 상황을 제대로 반영했는지도 의문이다. 안양천을 따라 총연장 10.33㎞로 지어진 서부간선지하도로는 2021년 9월 정식 개통됐는데, 개통 석 달도 안 돼 11월30일 침수됐다. 이 도로는 지하수와 빗물을 집수정으로 모아 배수펌프로 빼내는 구조인데 배수펌프가 고장 난 탓이었다. 서부간선지하도로 침수 당일 강우량은 28㎜에 불과했다. 2022년 8월 서울 남부 지역 폭우 때는 다행히 서부간선지하도로에 침수 피해가 없었지만, 언제 또 시설물 고장으로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설계기준만 높일 게 아니라 기후위기 상황에 맞게 모든 재난 예방과 대책을 재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2023년은 엘니뇨 영향으로 장마가 장기화하고 태풍 강도가 한층 강해지리란 전망이 나온다. 태풍이 발생하는 시기엔 지하공간은 물론 항만 등 해안 지역 재난 위험도 가중된다. 아파트 지하주차장 침수가 있었던 2016년 울산(태풍 차바), 2022년 포항(힌남노) 모두 태풍 시기에 일어난 사고다. 2022년 태풍 힌남노 땐 포항제철의 열연공장이 침수돼 사상 처음 고로가 멈춰 서기도 했다.
정부, 핵발전 산업 부양하려 근본 대책과 더 멀어져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기후위기의 원인인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의 핵심이라 할 재생에너지를 오히려 홀대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7월18일 4차 전력정책심의회에서 ‘2024년 전력산업기반기금 운용계획안(부처안)’을 심의·의결했는데, 전력기금이 재생에너지에 편중되지 않게 하겠다며 이를 송·배전망 투자 등 전력 인프라 확충과 핵발전 생태계 강화 등에 쓰겠다고 밝혔다. 2022년 전력기금 2조6854억원(결산 기준)의 절반(50.2%)이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신산업 활성화에 쓰였는데, 이를 줄여 핵발전에 쓰겠다는 것이다. 산업부는 또 7월5일 100㎾ 이하 소형태양광 우대 제도인 ‘한국형 발전차액지원제도(FIT)’를 5년 만에 중단하겠다고 했다. 생산한 전기를 20년 동안 고정가격으로 매입해주는 이 제도 덕에 국내 소규모 태양광이 급속도로 확대됐는데, 이를 더 연장하지 않고 예고된 일몰 기간까지만 시행한다는 것이다. 핵발전 산업 부양 일변도인 정부 기후대책의 단면을 보여준다.
스웨덴의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욕조에 물이 넘쳐흐르기 직전(기후위기)이라면 누구라도 가장 먼저 수도꼭지(온실가스)부터 잠글 것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고 그냥 놔둔다면, 그 사람은 사태의 심각성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즉시 해야 할 일을 미룰 때 벌어질 결과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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